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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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순간 듣는 순간 한생각 잘하면 그게 法!
할 것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고 살아야

수계를 받는 마음 자세


해마다 수계법회를 통해서 오계도 받고 연비도 받고 법명도 받는데 그러면 어떤 복덕이 있는지요? 그리고 저희 불자들이 부처님의 수계를 받는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우리가 항상, 마음에서 고장난 것은 마음으로부터 해결을 해야 하는 거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돼서 이 세상에 이렇게 인간으로서 등장을 했습니다. 인간으로 등장을 했는데 어떻게 살아야만 우리가 업을 짓지 않고 현재의 모든 것을 다 녹이면서 생동력 있게 또 걸림 없이 살아나갈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수억겁을 천차만별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날까지 진화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고등 동물이라는 인간으로서 이렇게 등장을 해서 살고 있는 이 마당에서 가만히 또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육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셨습니다. 육통이라는 것은, 이 몸뚱이가 통이 돼서 말입니다, 그 안에 천차만별의 모습과 의식들이 살고 있으니 어떻게 나 하나만이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한마음으로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한 몸뚱이를 한마음으로서 이끌어 나가려면 내 마음 자체를 움죽거려야 이 몸속에서 그대로 따라 준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몸속에서 그대로 따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공부를 그대로 잘하고 나간다면 그 육신 속에 있는 생명들의 의식이 다 그대로 따라 줍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돼서 모든 것을 털구멍을 통해서 바로 나가서 조절하고, 안에서 모자라는 건 작용을 해서 채워 주고 이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하면 관세음이 돼 줍니다. 즉 마음을 따라서 의식이 하기 때문에 의식은 보살로 화하고, 다스리는 중심은 바로 부처님으로 화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한생각을 하시면 의식들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가 돼서 보살로 화해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신다 이런 뜻입니다. 그와 같이 내 마음 쓰는 대로 이 육신 속에 있는 의식들도 따르니까, 마음공부들 열심히 해서 그대로 한마음이 돼서 들고 난다면 그것을 이름해서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속의 생명의 의식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나투신다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이 그대로 부처요 그대로 법신이요 그대로 화신 보현신이란 얘깁니다. 이게 전부 수계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자에는 오계를 설하면 ‘먹지 마라, 하지 마라, 죽이지 마라’ 이렇게 그냥 전체 다섯 가지가 다 ‘마라’로 됐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샛문을 틔워 놓지 않았습니까. ‘술을 마시더라도 분수를 알고 마셔라. 남을 위해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건 도둑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치라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살생을 하더라도, 짐승을 죽였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에 맡기고 하면 그대로 두 마음이 아니니까, 살리는 사람의 마음이나 살아난 사람의 마음이나 죽는 고기의 마음이나 전부 한마음이 돼서 고기는 고기의 허물을 벗고, 모습을 벗고 인간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또 이쪽에는 그 고기의 살을 약으로 먹으니 병이 나아서 좋고, 그렇게 보시를 하는 것은 살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죽이지 마라, 하지 마라, 먹지 마라’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스스로 분수를 지키면서, 스스로 남을 위하는 게 바로 자기를 위하는 거고 남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우니까 남을 위해서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럽게 행동해 줘라 이겁니다. 가정에서 식구들하고도 다 그렇게 하라는 얘기죠. 우리가 마음으로 지은 죄를 마음으로 벗어야지 만약에 말이나 이론으로 벗으려면 벗어지겠습니까? 그러니 만날 말씀해 드리는 게, 부처님 말씀하신 것에 입을 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뜻을 알고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게 열심히 하셔야죠. 부처님의 마음도 내 마음이고 부처님의 형상도 내 형상이고 부처님의 법도 내 법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둘 아니게 생각하면서 배우신다면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직결되어 있는 줄이 우리들의 근본의 줄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전기를 방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가발전소에서 가설이 돼야 전력이 들어오죠, 가설이 돼야. 그런데 가설이 다 돼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줄과 우리들의 근본의 줄과 이렇게 직결이 돼 있어요. 전기 가설이 돼 있듯이 말입니다. 가설이 돼야 불이 들어오죠? 우리는 본래 그렇게 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하고 그렇게 안 하니까, 즉 우리들의 스위치를 해 놓지 않았단 얘깁니다. 전기 가설은 다 돼 있는데 스위치를 해 놓지 않았으니 이게 불이 생전 가야 들어옵니까? 그걸 누를 줄을 모르고 누르는 거를 해 놓지도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스위치를 누를 줄을 알아야 오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스위치를 누를 수 있어야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이익이 갈 수 있고 공덕이 될 수 있고, 자식들을 돌에다 세워 놔도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 있고 조상을 이끌어서 건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대로, 오계를 받고 그대로 지키면서 공부하는 데에 따라서 요다음 생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주어지는 겁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거고,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또 우리가 한 철 살다가 갑니다. 금방입니다. 금방 옷을 벗고 다시 나올 때에 차원에 따라서 그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옵니다. 이 공부는 자유자재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지혜롭게 물리가 터져서, 천체 물리가 터져서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는 그 자유권 말입니다.
자각을 계속해야 하는지?


보조 스님의 수심결을 읽다가 문득 보고 듣는 이에 대해서 자각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생활 중에 될 수 있으면 잊지 않으려 하지만 때론 자각되기도 하고 어느 땐 잊혀지기도 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행 중 이러한 경계가 바른 것인지요. 수행에 있어 이러한 자각을 염념상속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몰록 놓고 가야 하는지 여쭈옵니다

그래서 나는 콩나무로 가끔 비유를 합니다. 어저께 콩씨를 오늘 아침에 심었더니 콩나무가 나더라. 그런데 그 콩나무는 어저께 콩씨가 자기 몸으로 화(化)해진 것을 모르고 어저께 콩씨를 찾느라고 바깥에서 애쓰더라. 오늘의 콩나무로 화한 콩나무는 그 콩나무에 바로 콩이 열렸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우리가 그 콩씨를 바깥에서 찾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가 움죽거릴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자기의 참생명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선은 움죽거리지 않지만 자기가 움죽거리는 것은 바로 바퀴와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봉은 움죽거리지 않듯이 그렇게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콩씨가 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깨닫는 대로 또 안으로 굴려서 자기가 나침반을, 중도를 세워서 항상, 입으로 나쁜 말이 튀어나오더라도 안으로 굴리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해서 인연을 맺고 또는 그렇게 해 나간다면 우리가 아마 부처님의 그 가르침의 뜻을 그대로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대에 맞춰서 꼭 알아야 할 문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대 돌아가는 것을 세계적으로 보세요.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면서 이 땅의 주인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각자 주인입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가? 그 생명선에 의해서 주어진 모든 것, 음파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빛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광명선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컴퓨터의 조절이라든가 영사기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인과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탐지기의 조절이라든가 무전기의 조절이라든가 이런 것이 다 자연적으로 자기한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물질과학이니 문명이니 문화니 철학이니 하는 모든 과목도 바로 인간에게서 주어지고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물질과학으로서, 문명으로서 이렇게 발전된 것을 기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 놓고 여러분이 바로 거기에서 죽어 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가 리드해 나갈 수 있는, 앞장서서 이끌 수 있는 그런 만능적인 자유인이 되고자 해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하는 자체가 벌써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산다고 아주 그냥 야단들이거든요. 자기가 사는 게 뭐 있습니까? 물 한 모금을 먹어도 혼자 먹지 않고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서로서로 먹고 사는데. 이것은 과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하고 의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어느 과목이든 들어가지 않는 과목이 없어서 심성천체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학(學)은 둘이 아닙니다. 몸과 자기 불성도 둘이 아닙니다. 콩씨와 콩싹이 둘이 아니듯이 뗄래야 뗄 수가 없죠, 그거는. 콩싹이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싹이 없으니까요. 진짜로 ‘아이고, 나는 바빠서 할 사이가 없어서 못합니다.’ 요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그럴 때 보면요, 난 저절로 웃음이 나고 아주 죽겠어요, 그냥. 아니, 세상 살아나가는 게 그냥,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게 자기가 태어났으면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자기가 또 콩씨를 만들려고 이렇게 하는 건데, 그러고는 살아나가는데 아이, 글쎄 누가 백일기도를 하랬나, 누가 삼천 배 절을 하랬나?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좀 앉아서 ‘주인공(主人空), 너만이 네가 있다는 증명을 해 줄 수 있어.’ 하고 관(觀)하고, 또 여유가 없으면 그냥 서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관하고, 앉으나 서나 변소에 가나 더럽고 깨끗한 게 불법엔 없으니까, 변소에 가나 어딜 가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다 그냥 통하는데 뭐가 바빠서 못합니까, 글쎄. ‘난 참, 바빠서.’ 하고 이렇게 모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만 끄달리던 분들도 안으로 관하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그렇게.
그러니 여러분은 진짜 내가 있으니깐 모두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고, ‘콩씨와 콩싹은 떼려야 뗄 수 없구나.’ 하는 걸 생각하시고, 또 자손들도 그렇습니다. 업으로 자손을 낳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원수로 자식이 생기는 수도 있고 또 선업으로 자식이 생기는 일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그 자식이라는 게. 그렇다면, 자손들도 원수로 태어났다면 말도 못하게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또 선업으로 태어났다면 그 가슴에 그렇게 좋은 결과를 주어서 흥락하게 만듭니다. 또 원수가 아니고 업장으로다가 만났다 이런다 하면, 극하게 그렇게 나가서 그냥 온통 그 속을 썩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녹이려면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때려도 아니 됩니다. 말로 한다면 오히려 더 빗나가요. 아주 듣기도 싫어하고요. 그리고 만약에 때렸다 하면 ‘아이, 요놈 때렸어!’ 하곤 그냥 또 나가죠. 여러분도 참 경험 많이 하실 겁니다. 그런데 요거를 녹이는 방법이 어떤 거냐. ‘업장이 생기게 한 것도 너고 업장이 안 생기게 한 것도 너고, 그러니까 나는 더불어 같이 공(空)했어. 나는 내가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저지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너만이 해결을 할 수 있어.’ 그러곤 그냥 딱 거기다가 맡겨 놓고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겁니다. 개미도 나가서 자기가 배가 고프면 먹을 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나갔는데 자기 살 궁리를 안 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부처님 제자로서 이렇게 모두 배우려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이 허깨비 같은 몸으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선과 더불어 거기에 마음을 낼 수 있는 그 자체, 몸을 움죽거릴 수 있는 그 자체, 삼합(三合)이 공존이 돼서 우리가 이렇게 여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비교할 때 항상, 어저께 부처와 오늘 부처가 둘이 아니며, 그럼으로써 여여하게 활용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는 그 점을 상세히 생각한다면 그대로가 부처님 법이며 그대로가 가르침이며 그대로가 행이며 그대로가 여여한 줄을 알 겁니다.

두려움 없이 시험을 보려면…


시험을 앞두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그런데 학생회에 다니면서 스님 법문 중에서 ‘내가 없다. 나를 버려라.’ 이런 말씀을 듣고 지금은 내가 없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거든요, 순간순간에요. 그러다 보니까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하고요, 시험도 시험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일과로 생각이 되고, 그냥 편안한 마음밖에 안 듭니다. 그런 제 마음에 대해서 스님께 정말 감사를 드리고요, 그리고 저를 비롯해서 전국에 있는 수험생들이 시험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 편하게 치를 수 있게 그렇게 마음내 주기를 바라고 여기 섰습니다. 마음내 주십시오.

마음을 제삼자에게 내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다 통한다.’ 이런 걸 좀 알아야 돼요. 즉 말하자면 남한테 마음을 내 달라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더불어 같이 내진다는 말이에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마라.’ 이런 것도 아니고 ‘생각을 내지 마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을 보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것저것 다 버리고 편안하게 하겠습니까만, 편안치 못하든 편안하든 다 버리는 겁니다. 놓는 겁니다. 이 몸뚱이가 고정됨이 없이 바로 화해서 나투면 찰나찰나 나투는 까닭에 공했단 말입니다.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했고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안 했고 이게 없다 이 소리죠. 그런 까닭에 주인공 자불이 나의 모든 기능을 합해서 시험을 보는 거니까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합격되게 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야.’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 보배를 자기가 응용 못하고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자꾸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데, 내가 무엇이 모자라기 때문에 누구한테 무엇을 물어봐야 하고, 책을 찾아 봐야 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죠. 그러니까 이 모두를 볼 때엔 모두 자기 할 탓이죠,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요. 모든 게 자기 할 탓이다. 자기가 하는 대로 삶도, 악도 선도 다 살고 있다. 자기가 할 탓이다 이거죠. 자기가 한 대로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자기네들이 한 탓으로 이렇게 되니까 너희들이 좀 벗어나서 살아라 하고 일러 주신 거죠.
예를 들어서 닭이 왜 사람으로 부화를 못하느냐. 닭으로 살던 습이 머리에 쟁여져서 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닭의 습성이 있어서요. 돼지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소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 살던 습성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도 그 습성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올라와서 사람까지 이르렀는데 사람도 천차만별로 차원이 있으니 이것을 어찌하느냐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두 생각해서 될 것도 아니고 ‘한생각을 잘하라’ 이런 뜻입니다. 생각하고 논의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고 한생각, 보는 순간 듣는 순간 한생각 잘하면 그게 법이 된다 이거예요. 법이 되면 한 발짝 떼 놓지 않고도 가만히 그 보살 응신들이 다 해결을 해요. 우리가 지금 한 발짝 떼어 놓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본래 한 발짝 떼어 놓은 바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직결돼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한 발짝도 떼어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별나게 사는 걸로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끝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한다면 우리가 할 거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한 것이 되죠. 내가 항상 말하죠. 여기 올라올 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고요. 우리 생활이 그런 생활이거든요. 그러니 그 발자국 떼어 놓는 동안에 어떠한 발자국을 떼어 놨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했고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안 했습니까? 떼어 놓은 대로 없어지는 것을요. 찰나에도, 지금 내가 말을 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 이전에 미래도, 바로 미래와 과거 교차로에서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을 먹어도 한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내 몸속에도 생명들이 많으니까 한 개체를 더불어 한마음으로 해야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일이고 진리를 파악해야 할 일이고 진리 속에서, 악과 선 그 가운데서 내가 악에는 어떡하고 선에는 어떡해야 하는지 그 도리를 말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에서 용법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공법’이라고 해도 되고 ‘용무’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함이 없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면 어떠한 거든지 손색이 없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실천을 항상 해 보십시오. 자기가 실천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이 있고 일체제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실천을 해서 감응이 되고 감응이 되면 한생각 해 보시고 ‘아, 이렇게 가는 거로구나.’ 하고, 또 상대를 만나 보면 내가 차원이 얼마나 됐는지도 알게 됩니다.

윤회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인간이 윤회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윤회를 하는 걸 본 사람도 없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정말 막연히 그럴 거라는 추측이 아닐는지요? 부처님께서도 그걸 겪어 보지 못하고 한 생 동안 살면서 전생이 있고 내생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건지요? 그리고 자유인이 되어 윤회를 벗어나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요?

평상시에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이 만행(萬行)입니다. 그대로 만행입니다. 만행이 따로 있어서 만행이 아니라, 그대로 만행입니다. 끝없이 이어 가는 그 행이, 고정됨이 없이 행하는 그 생활이 즉 만행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만행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육도만행(六道萬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만행이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가 있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육도윤회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육도윤회에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하고 가르침을 주신 거죠. ‘끊어라’ 그러신 게 아니라 ‘매이지 말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서 발 하나하나 디뎌 놓는 것도 바로 윤회거늘, 어찌 한 발짝 떼어 놓고 또 한 발짝 떼어 놓는다고 해서 거기에 치우쳐서 끄달리고 매이느냐.’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윤회에 매이지 말라.’ 하신 겁니다.
내가 지금도 얘기를 하다 올라왔습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아까 차를 한 잔 주는데 뜨거웠어요. 여기 올라오긴 해야겠고 이거를 빨리 식으라고 젓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니다.” 즉 “네가, 차걸랑은 데워 먹고 뜨겁걸랑은 식혀 먹어라. 이게 진법(眞法)이다.” 이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항상 육도만행을 하면서 육도윤회를 합니다.
그런데 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사에 의해서만이 윤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이 윤회입니다. 화(化)해서 나투면서 찰나찰나 변화되면서 돌아가는 이 만행이 즉, 윤회입니다. 윤회인 까닭에 그 윤회에 매이지 말라고 한 겁니다. 재차 얘기하지만,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대로 들을 수 있다면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대로 점프해서 넘어가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육도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생활하면서 고정됨이 없이 공(空)했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그것이니 매이지 말고 끄달리지 마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공했습니다. 너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꼬집어서 내세워서 나라고 할 게 없습니다. 안과 밖이 다 그러합니다. 안에도 내 집안의 모든 생명체의 의식들인 내가, 그러니까 사람 속엔 사람이 들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것을 꼬집어서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공하고 없다고 하는 겁니다. 내세울 게 없다. 없다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떤 걸 세울 게 없다는 거죠. 세울 게 없는데 무엇에 매이고 무엇에 끄달릴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근본의 도리에서 보면 윤회라는 이름조차도 없는 것인데 살면서 모두 그 이름을 지어 놓지 않는다면 질서가 문란하고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놓고 부르는 것입니다.
2006-11-20 오후 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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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