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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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신의 음료 ④ 다선(茶仙) 육우/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당대(唐代)는 중국 역사상 가장 휘황찬란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했던 시기로 정치ㆍ경제 뿐 아니라 문화교류 역시 활발했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차는 이런 경제ㆍ문화의 번성이라는 큰 기류 아래서 음다(飮茶) 풍습이 남방에서 북방으로, 변방의 각지까지 전해져 생산량이 확대되고 차를 안 팔고 안 마시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사대부들은 벼슬에 나가기위해서 과거에 응시했는데 응시자들의 답답함과 감독관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조정에서 특별히 다과(茶果)를 시험장에 보내 사대부들 사이에 음다의 풍속이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많은 시인들이 차를 즐겨 마셨으며, 좋은 물과 좋은 산을 찾아다니며 산수를 즐기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됐다.
또한 왕실의 무절제한 생활로 인하여 귀족들은 항상 정신이 혼미하고 피로가 누적되고, 과식으로 체증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시키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차를 마셨다.
이러한 차를 공급하기 위해 조정은 각 지역에서 질 좋은 차를 공납케 하여 공차(貢茶)제도가 생기게 된다. 왕실에서는 일반 승려나 사대부와는 달리 명차(名茶)와 명수(名水)에 사치스런 다구인 금ㆍ옥으로 된 다기를 사용하였다.
조정에서는 안사의 난(755~763)으로 곡식의 생산량이 줄어 술을 대량으로 만들 수가 없게 되자 금주령을 내렸다. 술의 가격은 너무 비싸 차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차를 마시게 되었고, 문인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건강에 이로운 차를 선호하게 된다. 이처럼 당초(唐初) 이래로 차 생산의 확대와 음다 풍속이 성황을 이루었지만 차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차의 깊은 뜻과 묘한 절경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육우는 차의 전문서적을 쓰기 위해 다년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호주에서 차에 대한 최초의 전문 서적을 저술하게 된다. 차의 고장인 강남의 맑고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생활하면서 유명한 시인과 명사들과의 교우는 그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육우는 어려서부터 지적법사에게 불교의 교리와 차 따고 끓이는 법을 배웠고 차에 대해 깊은 흥취를 갖고 있어 차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지적법사는 육우가 떠난 뒤에도 그의 차 달이는 맛을 잊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이 당시 경전에 대한 공부는 사대부들의 정도였지만 다예(茶藝)는 정통적인 학문은 아니다. 육우도 다른 사대부들처럼 유가 학설에 아주 익숙하였으나 일반 문인들과 다르게 유가적 학설에 구속받지 않고 심오한 원리를 차에 용해시켰다. 차에 대한 초고(初稿)는 안사의 난이 평정된 해인 763년, 그의 나이 28세에 저술되었다. 그 후 역대의 차사(茶事)를 수집하여<다경>을 보충하고 결국 10여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육우는 <다경>을 저술해 차 문화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였고 차의 생육과 음다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차에 배어있는 사상과 철학을 말하여 차 문화를 총체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융화하여 중국 전통문화의 특징을 살려 격식을 이루고 맑고 새로운 차 문화라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차를 더욱 잘 알게 되자 조정에서 그를 태자문학으로 임명하였으나 관직에는 관심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보냈다. 그 후에 사람들은 진흙으로 그의 형상을 만들어 집안에 두고 다신(茶神)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특히 차를 파는 집에서는 장사의 수호신으로 육우 도상을 장식해내는 풍습이 있었다.
2006-11-20 오후 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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