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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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호떡/원철 스님(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소란스러운 것을 ‘호떡집에 불난 듯 하다’거나, 수시로 변덕부리는 것을 ‘호떡 뒤집듯 한다’라는 말에서 보듯 호떡의 이미지는 그리 상쾌한 것이 못된다. 하긴 ‘호(胡)’라는 말자체가 중국문화의 주변부라는 말이다. 호떡은 북쪽 오랑캐들이 먹는 떡이다. 이는 주류음식이 아니라 변방의 먹을거리이며,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통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호떡이 들어온 것은 구한말이라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육군병력 3,000명이 조선에 진주하였다. 그 때 청나라 상인 40명도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그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청나라는 망해버린다. 하지만 상인들은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 음식점을 열었고 만두나 호떡같은 것까지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현재의 호떡은 6·25때 미군에게 배급받은 밀가루에 막걸리를 부어 하루저녁 재워 부풀린 다음 연탄불에 드럼통 철판을 올려놓고 구워서 판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고려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중기의 선사들까지 호떡을 구경하지도 못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호떡은 임오군란 내지 6·25 라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호떡의 전쟁이미지는 선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운문선사의 호떡’ 역시 ‘생사(生死)와의 전쟁’을 위한 무기인 화두이기 때문이다. ‘운문호병(雲門胡餠)’의 전말은 이러하다. 어떤 납자가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말씀입니까?”
“호떡이니라.”
선종에서 ‘호떡’하면 운문선사이다.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신이 호떡을 좋아하니까 자주 만들어 먹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그 회상에 호떡을 좋아하는 납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 같다.
호떡먹기 싫어서 운문종을 떠났다거나 호떡먹기 싫어서 다른 산중으로 갔다는 말에게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 덕분에 운문선사에게는 호떡법문이 많이 남아 있다.
어느 날 운문선사께서 재(齋)를 지내고 난후 호떡을 한입 깨물고 나서 말했다.
“제석천왕의 콧구멍을 물어뜯었더니 제석이 ‘아야! 아야!’하는구나.”
뜬금없이 호떡을 먹다말고 한마디 날리는 통에 대중들이 어리둥절했을 것 같다. 호떡을 먹으면서 공부하려는 마음은 간곳이 없고 달콤한 맛만 즐기고 있는 후학들이 마뜩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호떡법문은 몇 개 더 있다.

취암에게 어느 스님이 재(齋)를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재에 참석하리다.”
“물으십시오.”
그러자 문득 호떡을 하나 집어들었다.
“여기에도 법신이 있습니까?”
“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신을 먹는 것이군.”
그러자 그 스님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재에 가자고 청하지도 못했다.

숭수가 창문너머로 호떡을 만들고 있는 스님을 보면서 물었다.
“내가 보이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 호떡값을 되돌려다오.”

‘호떡존자’ 운문선사는 남의 법문까지 빌려와 당신의 법문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취암의 문답에는 “스님께서 정중하게 법석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고, 숭수의 문답에는 “스님께서는 호떡화로에 절이나 하십시오”라고 착어(着語)하여 호떡법문계의 지존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그나저나 호떡이 ‘어떻게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것’인지를 참구하는 것은 지금 남아있는 자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2006-11-20 오후 2: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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