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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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묵언과 눈빛/서울대 전기공학부
우리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문화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가. 대학 강의나 학술대회 세미나 등에서 발표를 한 후, 학생들이나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하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이 같은 상황은 특히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권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학생들은 질문을 많이 한다. 하찮은 질문일지라도 사뭇 진지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아마도 예의범절을 중요시한 유교문화권의 테두리 안에 있는 동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서양의 전통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양의 정신적인 자주이자 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 등을 살펴보면 진리에 한 발짝 더 접근하고자 말과 논리에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4대 성인인 소크라테스 또한 대화와 말을 통해 진리를 밝히고 오류를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그의 저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에서도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 법이 대부분 부처님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고 이것이 8만 법문을 이루었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술을 통한 부처님의 전법 전달의 전통이 왜 한국과 중국에 와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서술어 중심으로 되어 있는 서양언어에 비해서 함축적인 서술구조를 가지는 언어구조 때문인지, 노장자로 이어지는 언어 경시 전통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숭산 스님의 책을 보면 ‘힌두학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숭산 스님은 “이것이 무엇인가? 답을 해도 30방, 하지 않아도 30방을 맞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힌두 학자는 “모든 진리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식위에서 토론되고 전해져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선 수행에서는 묵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러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자신에 침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논리를 뛰어 넘는 선문답의 전통은 철저하리 만큼 말에 속지 않도록 다그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영상과 음성으로 대중에게 다가서야 하는 정보통신시대의 포교전략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말로는 속일 수는 있어도 눈빛으로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입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보다 눈빛으로 느끼는 사랑이 더 감명을 준다고 한다. 같은 뇌의 신경조직에서 나오는 신호인데도 왜 눈빛과 말이 차이가 나는 걸까. 아마도 오랜 진화를 통해 눈과 연결된 뇌신경구조가 더욱 깊은 잠재의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의 전통에 의해서 수련된 자비의 눈빛과 부처님 법을 전파하는 자비의 말이 같이 어우러진 균형 된 불자의 태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2006-11-20 오후 2: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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