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어느 교수가 영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국의 어느 교수가 말하기를 “불교는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인 듯하다. 아시아에 있는 못사는 나라들이 모두 불교국가가 아닌가. 그것을 보면 불교의 교리 자체가 가난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는 현대의 종교가 되기에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불교는 가난의 종교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한국인 교수는 세계 지도를 보면 경제적으로 절대 기아선상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타 종교국가를 볼 수 있는데,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불교를 매도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물론 불교는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 때문에 타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특별한 종교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재물은 크나큰 공덕의 증거로 생각하고 있음을 <아함경> 등 경전의 이곳저곳에서 알 수 있고, 재물이 많은 것에 대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가난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예컨대 <금색왕경>에서는 빈핍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떤 법을 괴로움이라 하는가. 이른바 가난이다. 어떤 괴로움이 가장 힘든가. 이른바 가난의 괴로움이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가지가 다름이 없으나 차라리 죽는 괴로움 받을지언정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
적어도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파악하는 한 불교에는 부자에 대항하는 ‘가난한 자의 벗’이라는 의식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함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는 식의 시각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경전에서는 재산을 어떻게 모아야 할 것인지를 인도하고 있고, 그 재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불교는 보시의 실천, 사회사업의 실행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봉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경전에 나오는 신자 중에는 하층 계급의 출신자도 상당히 많은데, 그들이 부자에 대해서 적대적인 반감을 가지고 대항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불교가 부에 대하여 무한한 찬탄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전제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부는 오히려 인간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부는 그 자체로서는 부러움의 대상도 경계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소비되는 과정에 의해 부의 가치가 비로소 결정된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적 목표 달성을 위한 수행만이 아니라 부도 인간생활을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가난을 지향하는 것이 불교의 가치라고 하는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재물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대항해야 한다고 하는 식의 시각도 절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가난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히 그릇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는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오도된 불교의 경제관을 바로잡아 불자는 물론 전국민에게 그 길을 제시하는 일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