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행의 근간이 되는 계정혜 삼학을 설명했다. 이 장부터는 보시, 성 안 내는 것, 인욕, 정진, 주력 공부, 예배, 염불 등 수행에 도움을 주는 방편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선가귀감> 46장에서는 보시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해 해탈에 이른다고 이야기 한다.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형편 따라 베풀지어다. 그들을 나와 한몸처럼 알고 베푸는 큰 자비로운 마음이 참보시니라.
원래 ‘보시(布施)’는 부처님 시대부터 있었던 수행방법으로서 범어 dana의 의역인데 자비로운 마음으로 복덕과 이익을 남에게 베푼다는 뜻을 갖고 있다. 실생활에 필요한 의복, 음식, 재물 같은 것을 무소유로 살아가는 수행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시주자로 하여금 공덕을 쌓도록 하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뒷날 이 ‘재보시(財布施)’는 보살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여기에 다시 중생의 거친 마음을 어머니처럼 편안하게 감싸주는 ‘무외시(無畏施)’ 불법에 인연을 맺게 하여 성불할 씨앗을 심어주는 ‘법보시(法布施)’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수행의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다. 재물과 부처님의 법을 따뜻한 마음으로 중생들과 나누는 이 공덕은 뒷날 수행에 커다란 힘이 되어 해탈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보시를 할 때는 찾아와서 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힘이 닿는 대로 재물을 베풀어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또한 세상의 삶이 덧없는 줄 알고 갖고 있는 재물로 삼보를 공양하고 수행자의 공부 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이 공덕으로 갠지스 강 모래알보다 많은 복덕을 지을 것이니, 이것이 재물을 베풀어서 세간의 헛된 집착을 없애 성불할 수 있는 ‘재보시’이다. 또 중생들이 재난을 만나 두려워하면 편안하고 온화한 모습으로써 주변을 어머니처럼 감싸 주어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비롭게 살아가는 삶으로써 두려운 세상을 부처님의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무외시’다. 또 법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알고 있는 대로 온갖 방편을 써서 법을 말하지만 명예나 존경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삶은 물론 법을 듣는 사람의 이익까지 같이 생각하고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법을 설함으로써 이 공덕으로 뒷날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성불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법보시’라고 한다. 법보시의 공덕은 다른 보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보시하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니 보시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점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첫째 보시 받을 사람의 덕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평등한 마음으로 두루 보시를 하되 원수나 친한 이를 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아하고 받드는 마음을 내고, 덕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둘째는 보시 받을 사람의 좋고 나쁜 점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착한 사람이든 착하지 않은 사람이든 차별 없이 저마다 바라는 바를 따라 널리 잘 살펴서 넉넉하게 재물과 법으로써 이익과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신분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귀하고 천한 사람을 제멋대로 나누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재물이나 부처님의 법을 두루 다 정성껏 보시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보시를 원하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의 구걸을 보더라도 따뜻하고 정중하게 대하면서 업신여기는 마음 없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거칠고 나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거칠고 추한 말로 그들에게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보시를 할 때 모든 중생들을 똑같은 한 몸처럼 알고 베푸는 큰 자비로운 마음이 되니, 이것이 ‘참 보시’이다. 그 베푸는 힘으로써 선과 악의 성품을 없애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성품을 없애고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성품, 이 모든 것들을 없애버린다면 곧 인연으로 만들어진 모든 법의 성품이 공(空)인 줄 알게 된다.
베푸는 사람도 공성(空性)이요, 받는 사람도 공성이며 오가는 재물이나 법도 공성이다. 이 모든 것이 공(空)일 때 또한 공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보시하여 베푸는 힘으로 없앴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곧 참다운 보시이며 온갖 인연에 집착하는 마음이 다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모든 번뇌를 여의니 <사익경>에서는 “보살이 마음에서 모든 번뇌를 버리는 것이 보시”라고 하였다. 이런 보시에 대하여 <심지관경(心地觀經)> 게송에서도 말한다.
能施所施及施物 於三世中無所得 我等安住最勝心 供養一切十方佛
베푼 사람 받는 사람 오고가는 모든 시물 / 과거 현재 미래 삶에 취할 것이 전혀 없어 / 텅 빈 충만 광명 속에 우리들이 안주하니 /시방세계 부처님께 참된 공양 올립니다.
이 게송의 뜻은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오가는 시주물품, 이 세 가지는 공성이어서 조금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온갖 인연이 모여 만들어진 시주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 시주물의 참 존재는 모두 알고 보면 본디 실체가 없는 공이므로 베푸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으며 오가는 물품 그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 ‘나’라는 번뇌로써 보시에 집착할 공덕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주는 사람[自]이 없고 받는 사람[他]이 없어 부처님 마음으로써 하나가 되니 이 세상에 오면서 가져 올 것도 없고 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져 갈 것도 없는 부처님의 참살림살이가 된다.
텅 빈 충만, 이렇게 참공덕인 부처님 광명 속을 오가는 참된 삶만 있을 뿐이므로 시방세계 부처님께 참된 공양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自他爲一 曰 同體 空手來空手去 吾家活計
나와 남이 하나로서 둘이 아닌 것 / 이를 일러 똑같은 한 몸이라 하고 / 맨손으로 왔다 맨손으로 가는 것 / 이것이 우리의 살림살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