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들도 국적과 시민권을 가진 국민인 이상 개인적으로 어떤 정파(政派)나 뉴라이트운동 같은 시민단체에 대해 사적인 자리에서 개인의 의견을 표시할 수 있고,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쪽에 투표할 자유와 권리를 당연히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불교 성직자들의 위치와 성직자 제도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에 비추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점들이 있다. 스님들의 경우 사바세계인 세속의 시비를 초월해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자 출가라고 하는 혁명적 결단을 행동으로 보인 분들이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와는 차원이 다른, 지성인 중의 지성인이 되고자 한 분들이다. 아니 지성인의 차원도 넘어서서 일체의 시비곡직과 분별을 떠나 깨침의 도리를 행동으로 보이시려 정진하시는 분들이다.
물론 출가하신 분들이 단번에 완전히 일체의 이해관계와 시비곡직을 초월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것을 꼬집어서 지적하거나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출가 초발심의 서원이 바람직하며 옳은 방향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출가자가 세속의 시비와 이해관계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사적인 경우에도 편가름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해관계와 시비곡직의 그물 한 복판에 놓여 있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 정치와 관련되는 집단의 조직에 관여하여, 한 편을 들고 공개적으로 참여한다면 어떤 결과가 되겠는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우를 싫어하고 좌를 좋아 한다거나, 무조건 뉴라이트의 취지를 반대한다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하여도, 우리 불교의 이상과 지고한 가치 기준에 비추어서 볼 때 참으로 애석하고 아쉬운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란 어떤 것인가? 혹자는 임진왜란 때의 호국승병의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살생유택(殺生有擇)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해석한다. 계율에도 개차(開遮)가 있다고 하며 이런 경우에는 살생의 계율을 깨뜨려도 무방하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이를 합리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 도망가는 사슴을 쫓는 사냥꾼에게 사슴이 간 방향을 일러주지 않고 거꾸로 일러주는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불망어계(不妄語戒)를 깨뜨렸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편법을 방편이란 이름하에 쉽게 열어 놓아서는 아니 된다.
‘불교 뉴라이트’에서 발표한 취지문을 보면 ‘현재 극단적인 좌우로 대립, 갈등, 국론분열이 전개되고 있고, 선동정치나 편가르기 정치 그리고 갈등조장행위 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배격해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인 행위에 스님들의 참여 그 자체가 벌써부터 불교계를 비롯한 사회일반에 찬반을 비롯해 의견이 분분하게 만들고, 어진 불교도들 마음에 내상을 내면서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며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스님들의 공개적 조직적 정치 관련행위, 그것은 어떤 분들의 의견은 될 수 있고 그 의견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범을 보여야 할 종교지도자로서는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삼계의 도사와 인천의 스승이 되겠다고 출가한 수행자들이라면 좌우를 막론하고 포용하고, 좌우의 편가르기를 넘어서서 좌우를 지양하고 발전시켜 보다 나은 차원으로 나아가도록 정진하게 인도하여야 할 책무가 있다고 보는 불자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기를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