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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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 마음도리를 공부해서 자성 발견해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화두입니다

우리가 사는 데는 한 달, 한 달이 있고 날이 있지만 여러분과 같이 앉았던 때가 바로 이 자리라고 봅니다. 사람은 항상 날짜를 따지고 월을 따지고 년을 따지고 하지만, 불바퀴는 시공이 없이 항상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바퀴라는 그 자체가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평상시에 살아나가는 것이 그대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나 깨나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화두 참구가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한 것 자체가 화두입니다. 화두가 따로 있어서 내가 화두를 딴 사람한테 받아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여북하면 부처 중생을 다 집어삼키는 공부라고 했겠습니까.
그대로 여여한데 그럼 왜 이런 공부를 해야만 하느냐? 이런 게 또 있겠죠. 하여튼 여러분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그 사실, 또 나 자체가 화두라는 거, 그리고 와선이나 입선이나 행선이나 좌선이나 이것을 한데 합친 것이 참선입니다.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動靜)’이라는 말 자체도 바로 그 뜻입니다. 이렇게 해 두고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들 하십시오.

▲질문자1(남): 항상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습니다만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점 송구스럽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하실 질문 요지를 수합하여 제가 대신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불성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에게 본래부터 불성이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불성이 온갖 무명(無明)을 일으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일 태초부터 무명이 있었다면 중생에게 어찌 불성이 있다고 했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불성이라는 것은요, 진리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성이라면 그 생명의 근본은 전체에 같이 돌아가는 평등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주와 이 세상이 직결이 돼 있고, 세상은 가설이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본은 그렇게 같이 돌아가지만 그 외에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의식 자체가 천차만별로 돌아갑니다.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중생(下衆生)은 나쁘고 좋은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짐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쁘고 좋은 걸 모르기 때문에, 이 몸 안에 들은 중생들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다스리면서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불성이 본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영혼 자체가 살아나온 관습에 의해서, 주어진 업에 따라서 그냥 진행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서 자기 자성(自性)을 발견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과 현실에 사는 자기가, 즉 말하자면 같이 합류화돼서 작용을 해야만이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질문자1(남):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주인공에게 맡겨라, 맡겨라 하시는데,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온갖 망령된 장난일 뿐이라고 이해됩니다. 맡긴다는 생각도 망념의 한 가지일 것인데, 망념 사량으로 주인공에게 맡겨서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지 저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여러분은 도인이 다 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허허허…. 첫째도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두 번째도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세번째도 둘이 아닌 도리에서 둘이 아닌 나툼을 알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명을 벗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몸 안에 들은 모든 의식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제 상대성의 끈에, 인과의 끈에 의해서 자꾸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첫째는 주인공이라는 중심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이든지 중심을 꿰어야만 바퀴가 굴러가듯이 말입니다. 차도 중심이 있으니까 바퀴가 굴러가죠? 사람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중심이 없으면 목석이죠.
그래서 가는 것만 알았지 오는 것을 모르니까, 오는 것과 가는 것을 한데 합류시켜서 작용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모든 것은 중심을 세워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거는 개별적인 하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하나입니다. 이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건 내면에서도 한마음이요, 모든 내면세계의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들도 ‘나’ 아님이 없습니다. 외부에서도 모든 것이 한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 하고 세워야 그 끈을 잡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걸 잡고 실험도 할 수 있고 그걸 잡고 체험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수련하는 것은 맡겨 놓는 작업입니다. 숙명통이 컴퓨터라면 거기에 입력이 돼서 악업 선업이 자꾸 나오는 것인데, 거기다가 되맡겨 놓아야만 앞서의 입력된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 나오면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놓으면 앞서의 것이 없어지고, 또 놓으면 또 없어지고, 또 놓고 이래야만이 내 마음이 스스로 밝아져서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1(남): 여쭙기 황송하오나 한 가지 더 여쭤 보겠습니다. 큰스님께서 발심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발심하셨는지요. 그리고 닦아 이루셨을 때의 체험은 어떠하셨는지요. 말씀하여 주시면 저희들 공부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큰스님: 아! 질문도 참 묘하게 하시는군요. 허허허…. (대중 웃음) 저는요, 9살에 남의 집에 가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디다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의지할 데가 한 곳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소리도 제대로 못 불러 봤습니다, 어떻게 엄한지…. 그래서 (가슴을 가리키시며) 여기에다가 아빠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가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나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인데 늙고 젊고가 따로 있겠느냐. 어차피 이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그냥 가는 게 좋겠지?’ 하고선 뭐, 죽고 사는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요.
남의 집을 살다 보니까 고생이 돼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어도 아빠를 부르고 울었고, 고독해도 아빠를 부르고 울었죠. 그때는 물통에 물을 길어다가 먹었습니다. 일 전을 가지고 물을 사면 고련씩 요만큼씩한 표를 주었는데, 표 하나씩을 가지고 한 지게, 두 지게 요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덟 지게를 져야만 그 집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홉 살, 열 살, 열한 살이 되기까지 그것을 져 날랐습니다. 그것만 져 나른 게 아닙니다. 엄마 없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를 업고 잤습니다. 그런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벌어지곤 했죠. 나는 그 아이가 불쌍해서 그냥 업고 자고, 온통 야단을 하고 울면 같이 울고, 그렇게 아빠에게 맡기고 했는데, 그 애를 주려고 과자를 사 놓은 걸 내가 먹었다는 겁니다. 그 사정은 일일이 말로 다 못합니다. 그런 것을 드러내 보일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 자리만 붙들고 울었을 뿐이죠. 이걸 얘기를 하려니까 그 얘길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래서 그저 모든 일체를 다 거기에 맡겨 놓고 했죠. 물을 길으러 가도 신발이나 좋았습니까, 어디? 게다짝이죠. 또 게다짝이 닳아서 못 신으면 짚신이죠.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물이 다 엎질러져서 옷도 다 젖고 그래서 귀퉁이도 무척 쥐어 박혔습니다. 그렇게 한 열흘이 지나니까 한 모금도 떨어뜨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또, 저 바깥에 나가서 뜨뜻한 물도 없이 기저귀를 빨아서 전부 철망에다 널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손이 얼어 부풀어서 그냥 뭐, 막 아파서 죽겠죠. 시린 게 아니라 아파요. 아픈 거를 꼭꼭 쥐고서 거기다 맡겼죠. 그저 그때서부터 거기다 맡기는 것을 내내 하면서, 밤이면 밤대로 나같이 이렇게 불쌍한 사람, 나같이 어려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그런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궁리를 했습니다. 그때는 또 밥을 굶는 때가 많았습니다. 아주 뭐 밥 굶는 사람이 늘비했죠. 그러니까 있는 곳간에 가서 보이지 않게 훔쳐다가 어떡하면 저 사람네들에게 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내면에 맡기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공을 했죠. 허허허….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게 참, 내내 그렇게 돼서 8ㆍ15 해방이 되기 전이니까 열여덟 살이 됐습니다. 그전에도 항상 감응은 왔지만 정말 열여덟 살에, 지금으로 치면 깨우쳤다 그러지만 그때는 그것도 몰랐습니다. ‘나’가 혼연히, 모든 것이 이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그 아빠는 반드시 나를 리드해 줬습니다. 항상 그저 잘못된 거면 잘되게 다스려 주고 또 이끌어 주고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는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네가 일할 때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일을 안 할 때는 네가 나와 하나가 되고,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자(子)가 부(父) 앞으로 가면 부와 하나가 되고, 부가 자 앞으로 오면 자와 하나가 되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그때에 생각하기는 체가 없는 마음이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이름이지 그 결과는 아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부와 자는 둘이 아니다. 그건 체가 없어서 그냥 이 몸도 움죽거리게 자꾸 이끌어 주면서, 그냥 같이 돌아가는 거니까 둘로는 안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알고 갔는데 그 후에 날이 퍽 추웠습니다. 날이 퍽 추우니까 ‘여름이 옳은 거냐, 겨울이 옳은 거냐? 겨울이 좋으냐, 여름이 좋으냐?’ 이렇게 물어요. 내가 모르니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죠. ‘여름과 겨울이, 사계절이 어떻게 둘이 되겠습니까?’ 했습니다. ‘사람이 춥다 덥다 하는 거지 진리라는 건 춥다 덥다가 없지 않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천지가 한데 합치는 거 같았습니다. 산하대지가 일제히 전부 손끝을 한데 모으고 (합장해 보이시며) 그냥 전부 그러는 게 보이면서, 천지가 그냥 하나로 뭉쳐져 버리면서 차츰 차츰 차츰 작아지면서, 불덩어리가 작아지면서 그냥 불덩어리 구슬이 돼서 그냥 ‘팡’ 하고 일어나는데 그때에 놀랐습니다.
그럭하고 난 뒤에 무척 울었습니다. 왜 울었느냐 하면 ‘천(天)은 지(地)를 다스리면서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을 다 기르는데, 제가끔 천차만별로 마음에 따라서 저렇게 짓고,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하니 참 너무도 기가 막히구나! 나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데, 왜 저다지도 저런가?’ 하는 생각에서,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하여튼 무척 울었습니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또 싱긋싱긋 웃고 다녔습니다. 내가 생각해 보면 나와서 가는 길만 알았지 오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금 이렇게 벌어지지, 가는 길을 알고 오는 길을 안다면, 그게 양면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좋은 겁니다, 싱그럽고. 그렇게 고생을 해도 고생하는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산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아홉 살, 8ㆍ15 해방되고 나서 입산을 해서 스물세 살, 즉 말하자면 6ㆍ25 나던 그해 3월달에 계(戒)를 받았죠.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 말을 영 못하다가 이 근래에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오늘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질문자2(남): 큰스님, 저는 2년 전에 큰스님을 뵌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것을 진솔하게 그냥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업이 무엇인가 하는 의정이 나서 여쭤 보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처음에 제가 큰스님을 친견할 당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다리가 가늘어져 힘없이 넘어지기도 하고 또 버스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려는 그런 상황에서 큰스님을 뵈옵게 됐는데, 그 인연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2년 동안 큰스님의 가르침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꾸준히 계속 나오면서 도반들하고 이렇게 쭉 공부하다 보니까, 작은 변화지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도 드리고 또 궁금한 거는 여쭤 보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욕심이 많다 보니까 직장에서 진급을 목표로 해서 늘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 전부터는,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가족과 저와, 또는 저와 인연 닿는 사람들을 제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데, 나쁘게 얘기해서 제물로, 심지어 제 와이프와 아이들까지 제 목표를 달성하는 구실로 다 이용하였는데, 어느 날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는데, 꿈속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다가 깨 보니까 꿈에서 울었는데도 베갯잇이 전부 젖어 가지고 저도 깜짝 놀랐죠.
그런데 머리끝부터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정신이 바짝 들어서 일어나 보니, 옆에 와이프도 자고 있고 아이들 방에 가 보니 아이들도 자고 있는데 그날 이후로는 ‘참! 부질없는 짓을 했다.’라는 생각이 들고 와이프한테 그렇게 잘못했던 것이 안쓰럽고 그래서 제 나름대로 ‘물고기를 놔 주는 것만 방생이 아니다. 내 목표 달성하는 데 제물로 이용한 그 부분을 놓아 주자.’고 마음먹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역시 나 대신 아파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뭐, 특별히 목표를 세워서 출세를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마저도 자연스럽게 놔지고, 또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어떻게 돼야 한다는 그런 욕심도 그냥 자기 업대로 인연 따라 살겠지 하고 놔지고 와이프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놔졌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떤 변화가 왔느냐 하면, 제가 환자여서 지금 현재 불편하면서도 환자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그냥 평소에 생활을 하다가 오르막길이든지 내리막길이든지, 현실에 부닥쳐서야 ‘아, 참! 내가 아프지.’ 하고 그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도리인지 지금도 의정이 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병도 그렇고 또 직장 일에도 무관심한 건 아니었지만 주어진 여건을 소화만 해 나갔는데도, 역시 또 생각보다 빠른 진급을 했습니다, 금년 7월에요.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안달을 해도 잘 안되더니 그냥 맡겨 버리고 생활을 하다 보니까 되더군요. 이것이 맡기는 도리인지, 그래서 진급도 이렇게 해서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환자라는 생각과 자기를 비하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넘어지면 어떡하나, 차를 못 타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염려하는 버릇이 없어져서 경우에 따라서 자가용이 없으면 좌석버스도 타고 그렇게 생활을 합니다, 불편하면서도.
요즘 많이 생각하는 의문이 뭐냐 하면, 도대체 등산하다 넘어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디 눈에 보이는 상처 부위가 있어서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리가 가늘어지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것은 현세의 어떤 업이 아니라 전생에서 제가 무슨 업을 지어 가지고 온 모양인데, 이게 무슨 업으로 내가 이렇게 되는지, 그리고 또 이렇게 녹여 나가다 보면 그 업도 금생에 녹여져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지 이 부분이 참 궁금해서 큰스님께 여쭤 보고자 나왔습니다.
▲큰스님: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부부 사이에서 몸 하나를 받아서 내 영혼과 인연의 줄을 다 끌고 한데 합쳐집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 됩니다. 그런데 그 과거의 인연들이 전부 내 배낭 속에 있습니다, 지금 모두가. 그러니 과거는 없어요. 그래 배낭 속에 있어 가지고 배낭 속에서 과거에 지은 업이 그냥 나오는 겁니다, 그대로. 몸으로 반영되기도 하고, 괴로움으로 반영되기도 하고, 애고로 반영되기도 하고, 유전성으로도 되고 영계성으로도 되고 아주 뭐 복잡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녹이려면 모든 것에,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거기서 나온 거니까 무조건 거기서 해결할 수밖엔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고, 거기서만이 낫게 할 수 있고, 낫게 해서 끌고 다니는 것도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그렇게 자기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세요. 이열치열이란 말도 있죠, 거기다 놓으면 거기서 해결이 나는 겁니다. 모든 게 녹아지고요.
그것이, 즉 말하자면 인과로 인한 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모두 관습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게. 업이 달리 생기는 게 아닙니다. 모두 살아온 관습 때문에 엄청난 문제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도 세포 하나하나에 중생들이 들어 있으면서 악이면 악으로 갚으려고 하고, 선이면 선으로 갚으려고 두서없이 나오는데 그 나오는 중생들의 의식은 좋고 나쁜 걸 몰라요. 그러니까 사람이 다스려야 된단 얘깁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한마음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해결을 한다.’ 이러면 원수졌던 마음이 그냥 까맣게 잊혀지고 그냥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뭐 특별히 우뚝 솟는 거는 없다 하지만 차차차차 그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이지 밝은 세상을 사시게 됩니다. 아까도 질문할 때에 나의 과거를 물었지마는, 내가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모르는 걸 배워서 모릅니다.”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을 위해서 그냥 그렇게 얘기했던 겁니다. 어저께가 따로 있고 오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은 그대로 그대로 돌아갑니다.
▲질문자2(남): 큰스님,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우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천도재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여름 티베트 왕사인 달라이 라마 스승이 환생하셨다는 링린포체라는 동자승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국 사찰을 순회하면서 설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제가 보고 의정이 난 것은, 제 소견으로 천도재는 조상님이 열반하시고 나면은 다시 환생하기 전에 ‘좋은 곳으로 환생하십시오.’라는 후손들의 간절한 뜻으로 지내는 재사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링린포체처럼 새로운 육(肉)을 받아서 금생에 다시 태어났다면 육과 종전에 조상이었던 영이 하나가 돼서 금생을 지나가는 어떤 동자승일 텐데, 그 동자 스님이 어느 날 다시 육으로 금생에 살다가 홀연히 육에서 빠져나와서 전생의 자기 자손들한테 가서 해도 끼치고 또는 복도 좀 주고 가르침도 주고 해코지도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건지요? 그 부분이 상당히 궁금하고, 또 천도재는 지내는 시기가 있는 건지요? 아니면 그렇게 인도환생한 이후도 자손들이 조상님을 위해서 천도재를 계속 지내 드려야 옳은 건지 그 부분이 상당히 궁금합니다.
▲큰스님: 조상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부모의 천도를 시키는데 부모가 전자에 살면서 그 의식과 관습을 그대로 가지고 갔기 때문에 세세생생에 끄달리는 거죠. 그런다면 그게 왜 끄달리느냐? 내 몸체가 죽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몸체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잘못해서 어떻게 됐다는 것도 모르고, 아주 캄캄합니다. 눈이 뜨이지도 못하고 귀가 뜨이질 못해서, 그 의식만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내 몸속에 있는 인과로부터, 그 수없이 천차만별로 나오는 거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벌써 내 모습과 모든 것이 그전에 살아 있을 때처럼 있는 줄 알고 강을 못 건너갑니다. 예를 들어서 유(有)의 세계에서 무(無)의 세계로 건너가야 할 텐데 건너가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빠져 죽을까 봐, 체가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갑니다. 셋째, 이 불바퀴가 돌아가는데, 그 불바퀴 속을 넘어서야만이 우리가 해방되는데, 그 불바퀴 속을 넘어서질 못하는 이유는 내 몸이 있는 줄 알고 타 버릴까 봐 못 들어가는 겁니다. 못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의식이, 관습이 남아서 돌아가니까 첫째, 강 주변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저 언덕을 넘어서야 할 텐데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천년이 가도 그만이요 만년이 가도 그만이다 이겁니다. 한생각이면 건너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를 이 생시에 몰랐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렇게 모른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줄 알고 친척이나 아들이나 딸한테로 맴을 도는 거죠, 넘어가질 못하니까. 맴을 돌면서 자기는 산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쪽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니까 ‘왜 내가 말하는 거 듣지도 않고 왜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그러느냐?’ 이렇게 하면서 탓을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먹을 것도 저희들만 먹고 나는 안 주고.’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지 부모가 자식을 해코지한다, 이런 게 없습니다. 부모 자식도, 사는 동안에 부모 자식이지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습니다. 왜냐? 죽어지면 사대(四大)는 흩어지고 마음은 저 구름이…,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서 이 도리를 알아야 사대가 무너지면 훨훨, 그냥 여여할 텐데 살아서 여여해야 죽어도 여여한데 그렇지 못하고선 그냥 발버둥일 치고 분기가 나고 그러니까 그냥 여기 붙어서 분기가 나게 하고, 저기 붙어서 분기가 나게 하고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고요.
(다음 호에 계속)
2006-11-06 오후 3: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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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