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해 끊임없이 동경(憧憬)하면서도 늘 옛것을 그리워하며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쉽고 빠르게 변화되는 것이 있는 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원형이 유지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환경과 습관에 따라 변화되는 것으로 그 나라와 지역의 풍토와 정서에 어울리는 전통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차가 가장 먼저 생산ㆍ음용된 곳은 파촉(巴蜀)지역으로 지금의 운남(雲南)과 사천(四川)지역 등이다. 이 지역의 차나무는 대엽종(大葉種)이 많으며 찻잎이 크고 두꺼워서 잎을 가공하여 주로 약용(藥用)으로 이용했고, 찻잎에 쌀ㆍ생강ㆍ파ㆍ귤 등을 넣어 끓여 죽처럼 먹기도 했다. 이처럼 차가 서남지역의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식용(食用)과 약용(藥用)으로 이용, 변천되어 기호식품으로 음용(飮用)될 때까지 차를 마시는 방법과 즐기는 사람의 계층은 다양했다.
차의 고사(古事)에 의하면 전한(前漢) 때 왕포의 <동약( 約)>을 보면 이미 차가 경제적으로 이용되었고, 차를 마시는 도구와 차를 준비하는 다동(茶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임금인 손호(孫皓)는 본래 괴팍하고 술을 좋아하여 연회 때 마다 신하들과 술을 마셨는데, 신하들은 일곱 되(升)의 술을 마시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어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손호가 총애하는 학문이 높은 신하인 위요(韋曜)가 술을 마시지 못하자 임금이 몰래 차를 주어 술 대신 차를 마시게 하였다. 이때에 궁중에서 차가 음료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진(晉)나라 사람인 육납(陸納)은 생활이 검소하고 곧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루는 그의 집에 위나라 장군 사안이 오자 그의 조카는 많은 요리를 준비하여 대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육납은 차와 과일로 그를 접대하였고, 그가 돌아간 후에 조카를 꾸짖고 곤장을 때렸다고 한다. 이처럼 차는 검소하고 청렴한 인물이 선호하여 즐겨 마시는 음료로 상징되어 상류사회에서 사교용품으로 유행했다.
또한 차가 제사에 이용되기도 했는데, 무제(武帝, 남제 영명11년)는 자기가 죽은 후 제사를 지낼 때 살생을 금하고 떡, 과일, 차, 밥, 술을 올리게 하여 궁중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제도를 따르게 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미 음료 문화로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북방의 소수민족들까지도 차를 마시게 되었지만 그들은 주로 양고기와 유락(乳酪)을 주식으로 하여 초기에 차를 마시는 것이 습관화 되지 않아 차를 마시는 사람을 비난하고 무시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하지만 당대(唐代, 618~907)에 이르러서 활발한 문물교환으로 차는 수로와 육로를 통해 전파되어 음차(飮茶)의 풍속을 갖지 않은 소수민족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돈을 주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많은 다점(茶店)이 형성되어 차를 마시는 풍속이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불교가 가장 융성하였던 이 시기에 봉연의 <봉씨견문기>를 보면 ‘선종의 교리를 배우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저녁도 먹지 않으면서도 차만을 마셨다’는 내용은 불가에서 선종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 밥을 먹는 것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사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화려하게 번영을 누렸던 당나라 때 차 문화는 육우의 <다경>을 통해 더욱 더 빛을 발휘하게 된다. 이 경전은 처음으로 차나무의 생육과정에서 차를 달여 마시는 방법, 차의 고사(古事) 등 차에 관련된 모든 것을 수록한 책으로 중국의 차 문화를 응집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