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만해는 <님의 침묵> ‘반비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 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여요.”
침묵 안에 님의 소리가 들린다? 이 말로 분명한 것은 님은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일게다. <금강경> 또한 “여래는 형상으로 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친절에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이어 “내가 말하는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님은 형상으로도 볼 수 없고, 목소리로도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만해의 말대로, “님은 침묵 속에 있는 것”이다.
우선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적어두고자 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그는 말하지 않을 뿐, 자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그를 향해 “감싸고 돈다.”
님의 침묵, 그 세 가지 이유
그는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 속에 자신의 그리움만 깊어가는 강물이게 할 뿐이다. 그는 왜 침묵하는가. 왜 침묵 속에서 홀로 속을 앓고 있는가.
(1) 그는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48년 동안 긴 혀를 두들겨서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교’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겸허하게 설정한다. 그 ‘가르침’은 ‘그 자체로’ 가치를 확보한다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도구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망치가 못을 박거나 빼기 위해 존재하듯이, 불교는 ‘어떤 실용적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불교는 ‘노파심’의 발로이다.
(2) 석가를 위시한 여래들은 중생을 위해 화신(化身)으로 왔다. 중생이 어둠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다면, 석가는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 중생이 돈교, 즉 ‘본래’ 깨달아있는 존재라면, 그는 ‘본시’ 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중 과격한 선사들이 “석가가 괜히 와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켰다”고 불평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따위를 내 앞에서 말했다면, 내가 몽둥이로 두들겨 팼을 것”이라고 콧김을 뿜기도 한 것이다.
(3) 요컨대 님은 중생의 구원을 위해 발언하지만, 그 발언은 다만 방편이라, 최종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무(無) 없다. 그렇게 마련된 ‘빈 공간’이 중생들이 자신의 삶을 활개칠 무대가 된다.
님은 중생들의 비원을 위해 이 땅에 와야 한다. 그 님이 없이 어떻게 이 허무한 삶, 작은 걱정, 큰 고난이 겹겹이 중첩된 이 사바의 삶을 견디겠는가. 그러나 님은 그 구원이 ‘자신에 대한 의지’로 귀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중생을 위해 왔지만, 중생을 위해 다시 떠나갈 수밖에 없다. 떠나가지 않는다면, 침묵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님, 위안이자 구원이신 분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중생들은 그 ‘부재’의 순간 절망한다. 어떻게 이 팍팍한 삶을 견딜 것인가. 그 전날, 그가 준 구원의 약속은 세상의 고통을 견딜 힘이었고, 그 허무를 이겨줄 든든한 의지처였는데, 그는 더 이상 내 버팀목이자 사다리이기를 포기했다. 그는 떠나감으로 자신의 자비를 완성하려 하고 있다. ‘푸른 산빛’으로 보였던 그 희망은 단풍나무 숲의 다양한 채색, 혹은 조락의 예감으로 흩어지고, 내가 의지했던 그 ‘황금의 약속’은 나만의 환상, 이미지(相)였던 것을….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여래, 혹은 불법과의 만남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왜. 그는 삶의 전적인 탈각, 세속적 가치와 기대의 전적인 포기를 종용하기 때문이다. 세속이 주는 즐거움을 전적으로 포기하라는 님의 속삭임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금속성으로 날카롭다. 그와의 만남으로 나는 청춘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리고 사막으로 토굴로 들어간 수도사들의 삶을 살게 되었다. 피안을 약속하는 불교의 권유에, 나는 육진(六塵)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육근(六根)을 닫아 버리도록 떠밀린 것이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는 이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나의 삶일 수 없음을... 그는 다만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나로서 살 수 있게 해 준 ‘조력자’라는 것을….” 불교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금강경>을 읽는 사람은 안다. 수많은 불법들이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고안되고, 수많은 여래와 불보살들, 그리고 선지식들이 내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해 화현(化現)된 분들임을….” 망치는 못을 빼면 버려지고, 뗏목은 강을 건너서도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다. 불보살들의 화신 또한 역할을 다하면 그만 떠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보내는 자, 이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실제 겪는 이별은 얼마나 아득하고, 슬픈가. “그 의지처 없이도, 나는 홀로 설 수 있을까. 이 막막한 세상, 두려움과 고통이 질펀한 이 사바를, 이름 그대로 견딜(saha, endurable) 수 있을까.”
존재의 부름에 귀기울여라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이별 앞에 울지 마라. 너는 너 자신 속에 있는 불성, 그 위대한 힘을 끌어올려 이 팍팍한 세상의 고통과 불확실을 견뎌나갈 수 있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 위대한 힘의 젖줄은 영원에 닿아있으니, 그 대승(大乘)에 대한 믿음을 기신(起信)하라. 그는 떠나면서 일렀다. “나를 위시하여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 네 속에 있는 그 부처, 질식하고 있는 부처의 빛과 힘에 의지해라. 그 힘과 빛은 본시 위대한 하나에 닿아있고, 그것이 발현되는 장소에,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들이 같이 있다. 그 호념(護念)을 기억하라.”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슬픔은 정화와 성찰의 계기이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고 읊은 시인은 누구였던가. 하이데거는 슬픔이야말로, 나아가 죽음이야말로, ‘존재의 부름’에 귀기울이게 하는 계기라고 했다. 슬픔은 찐득한 욕망과 얕은 일상의 거품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삶을 고양시키고, 근원으로 회귀하게 한다. 그 성찰이 희망이다. 어느 소설가는 “슬픔도 힘이 된다”고 썼다.
그 성찰이 있어 일상은 의미의 광채를 띤다. 님의 부재를 그리워하면서, 그 부재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그는 일상을 법답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복종의 삶이다. “당신은 행인, 나는 나룻배, 나를 밟고 가시어요.” 만해는 지금 도저한 개인과 욕망의 시대에, 자비와 헌신의 불교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그대 지금,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그대 지금 누구를 위해 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