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38장부터 41장까지는 아름다운 삶으로써 계율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고, 42장은 계율을 잘 지켜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한 선정의 힘이 길러진다고 하였으며, 43장에서는 고요한 선정에서 나오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 지혜로 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모습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 내용을 정리하여 <선가귀감> 44장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삶으로써 계율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이 불생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선정이니 ‘무념(無念)’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 무념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지혜이니 해탈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見境心不起 名不生 不生名無念 無念名解脫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불생은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은 해탈(解脫)이라 한다.
이 글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4권 무주전(無住傳)에 나오는 글로서 그 앞뒤 내용을 보면 불생이 무념이며 해탈인 것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묻기를, 어떤 것이 ‘불생(不生)’이고 ‘불멸(不滅)’이며 어떻게 해야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니, 스승이 답변하였다.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불생’이라 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멸할 것이 없으니 ‘불멸’이다. 이미 생겨나거나 멸할 것이 없으면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그 자리가 바로 ‘해탈’이다.
‘불생’을 ‘무념’이라고도 하니, 무념은 생멸할 것도 없고 구속될 것도 없으며 해탈할 것도 없다.”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그 경계에 집착하여 일어날 마음이 없으니 이를 ‘불생’이라 하고, 이 불생에는 어떤 경계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이를 ‘무념’이라 한다. 무념에는 집착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본디 거기에 얽매일 일이 없어 해탈할 것도 없다.
해탈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경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 해탈할 것도 없는 이 자리야말로 ‘참 해탈’인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불생이 무념이고 무념이 참 해탈이니, ‘불생’과 ‘무념’과 ‘참 해탈’은 그 바탕이 하나라는 뜻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와 똑같은 내용을 <육조단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살펴서 안팎이 분명해야 자신의 본디 마음을 안다. 본디 마음을 알면 ‘해탈’이고 해탈이면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는 ‘무념’이다. 무엇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무념이다. 이 마음을 쓰면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 하되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깨끗한 본디 마음이 몸에 있는 감각기관에서 활동하되 경계에 물듦이 없게 하여 오고감이 자유로워 그 쓰임에 걸림이 없는 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이를 무념행(無念行)이라고 한다.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끊기만 한다면 이는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라고 한다.”
이 단락에서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무념’이다[若見一切法 心不染著 是爲無念]”라고 한 표현은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불생’이라 한다[見境心不起 名不生]”라고 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은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무념’이 ‘불생’이고 ‘불생’이 무념이 된다.
또 이 단락 앞부분에서 “본디 마음을 알면 해탈이고 해탈이면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이면 무념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반야삼매는 선정을 가리킨다. 삼매는 범어 samadhi의 음역이다. 의역은 등지(等持)·정(定)·정정(正定)이라고도 한다. 등지(等持)라고 번역할 때 등(等)은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거나 침체된 상태를 벗어나 어떤 경계도 차별 없이 바라보는 편안한 마음상태를 가리키고, 지(持)는 오로지 어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어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므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아 나타나는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상태를 말한다. 곧 삼매는 선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경계를 마주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써 ‘불생’ ‘무념’ ‘해탈’의 경계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는 저마다 하나씩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하나만 취하고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삼발이 솥처럼 언제나 함께 하고 있어야 제 역할을 다하니 세 가지 모두 마음에 두고 함께 닦아나가야 한다. 이것에 대하여 서산 스님은 말한다.
戒也 定也 慧也 擧一具三 不是單相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 가운데에서 그 어느 하나를 들어도 그 하나에 셋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그 어느 것도 홑으로의 모습이 아니다.
부처님의 삶인 계율을 잘 지켜야 마음이 편안해져 선정의 힘이 길러지고, 선정의 힘이 길러져야 여기에서 참다운 지혜가 나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율을 떠나 선정과 지혜가 있을 수 없고, 선정을 떠나 계율과 지혜가 있을 수 없으며, 지혜를 떠나 계율과 선정이 있을 수 없다. 계율 속에 선정과 지혜가 들어 있고, 선정 속에 계율과 지혜가 들어 있으며, 지혜 속에 계율과 선정이 들어있다. 계정혜 삼학 가운데 어느 하나를 들면 나머지 둘은 저절로 따라가니 하나 속에 셋이 다 갖추어진다. 어느 하나도 둘을 떠나 홑으로의 자기 모습만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불생’과 ‘무념’과 ‘해탈’의 관계도 이와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경계에 시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 자체가 ‘불생’이요 ‘무념’이며 ‘해탈’이 된다. 수행이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떨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