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내가 한다는 게 붙지 않으면 두려울 게 없어
자기부터 완성해야 일체제불의 골수 알 수 있어

산 불교가 되게 하려면…


북한의 핵 실험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불완전한 안보 때문에 온 국민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어떻게 마음을 내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할까요? 참다운 불자로서 마음의 안정과 안식만이 목적이 아닌 산 불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할는지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잘 들으세요. 차분하지 못하다면 바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세계에는 욕심이 많아서 싸움이 생기고 서로 쫓기고 쫓으면서 지금 난리 아닌 난리를 치고 가는 겁니다. 몸으로 찔러 죽여서 싸움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고 딴 나라도 그렇고, 물질과 물질이 붙는 싸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알력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싸우고 가지 않습니까? 먹고 먹히면서 말입니다. 이거를 어떻게 탈피하면서 대처하면서 충당하면서 나갈 수 있겠느냐. 바로 이 마음 도리, 이 도리를 알아야 되겠다는 얘기죠. 인간 자체 자기부터 완성해야만 모든 이치를 알고 일체제불의 골수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불법의 교리를 그냥 그냥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진짜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고 물러서지 않고, 만법이 들고 나는 작용을 항상 자기 원력에다가 놓고 맡기고, 그렇게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선이며 행선(行禪)입니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항상 되풀이하고 넘어가느냐 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안 하신다면 앞으로 이득이 하나도 없고 이득이 없는 반면에 지구라는 배 안에서 사는 생명들에게도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동물, 이런 말들이 이름으로 지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온 자체로 인해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생물학이니 또는 정치니 국민이니 공학이니 하는 문제들이 점차적으로 나온 겁니다. 문학도 그렇고 의학도 그렇고 말입니다. 전자에도 그런 말을 모두 유식하게 했지만 우리가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계발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오백 년 역사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인간으로서 주어진 능력으로 행을 해 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우리 역사가 달라지며 차원이 달라질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이 말로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법(法)이 될 수 있게끔, 생활에 실천으로 보급이 될 수 있는 그런 법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말하는 이 말 자체가 현실로서 일체 만물 유생 무생(有生無生)에서 다 같이 이루어져서 우주의 개발로부터 우리 인간의 계발이 동시에 실천에 옮겨져야 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그 도리를 알아서 앞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바로 찰나 찰나 무기가 된다면, 그 하나가 바로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속담의 말처럼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죠. 한마음의 한 점은 바로 우주의 근본이며, 태양의 근본이며, 바로 천지의 근본이니 내 한마음의 한 점이 그렇게 위대하다는 겁니다. 그 위대한 한 점이 아까 속담의 말처럼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인데 나오는 거만 말하는 게 아니라 나오는 것도 주는 것도, 하는 것도 드는 것도, 덮는 것도 굴리는 것도 모두 그 한 점의 마음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실천으로 옮겨야만 되는 건가. 여러분이 공부를 해서 앞으로 그 한 점의 요리를 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 마음 자체를 한마음으로 굴리면서, 바깥으로 굴리지 않고 안으로 굴리면서, 안으로 굴린 거기서 무심코 한생각 나는 것이 우주 개발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우주의 개발이 우리 지금 살아나가는 생활 속에 있다면 바로 신성한 우주의 개발이란 얘깁니다. 그러면 우주만 신성하고 여긴 신성하지 않으냐. 아닙니다. 모두가 신성한 곳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설법으로만 듣고 그냥 귓전으로 흘려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실천에 옮기는 말을 하지 실천이 아닌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가깝게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들, 세계적으로 합류가 돼서 벌어지고 있고,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혼란이 일어나고, 혼돈이 일어나는가 하면 잔잔히 가라앉고, 가라앉는가 하면 일어나고 하는 문제 등등이 그렇게 어렵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주의 한마음 그 뜻이, 우리 지구를 지속시키는 반면에 모든 공해가 빠져 달아나가고 또는 한마음 한뜻으로 조화를 이루고 굴곡이 지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초를 닦기 위해서 발판을 세우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 국가적으로나 또는 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어떻게 해야만 그런 거를 다 실천해서 평온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는 우주의 개발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저기서 여기 옮겨 놓으면 모르고 저기서 저기 옮겨 놓으면 모르듯이, 굼벵이가 매미가 될 때 모르고 매미가 굼벵이가 될 때 모르듯이, 우리 인간도 그렇게 연쇄적으로 진화되면서 형성해 온 것을 모르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많이 계발된 것이, 지금 유전자로써 많은 물질이 바꿔지기도 하고 또는 많이 나기도 하는 것을 연구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때는 무루(無漏)의 무전자로 하여금 유전자가 있고 유전자로 하여금 물질이 나온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무루의 무전자가 그 유전자를 없앨 수도 있고 또 많이 생기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전자의 원자력도 될 수 있고 통신력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력에 의해서요. 즉 말하자면 그전에도 얘기했듯이 자석과 같이 모든 것이 하나에 붙으면 붙는 대로 타 버리는 능력이 아주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뭐든지 집어삼킬 수 있고 또는 그것을 요리해서 에너지로 만들고 영양소로 만들어서 여러분한테 이익도 줄 수 있는 그런 자유권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이 지구에 있는 여러분이 세계적으로, 살아나가는 데 차원을 높여서 지금 현실에 살아나간다면 생활이나 모습이 달라질 겁니다. 역사도 그렇고요. 지금 점차적으로 달라지고 있지마는 앞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스위치를 눌러서 말을 듣고 썼지마는 한생각 내면 그냥 통과가 될 수 있는 그런 세상도 맛보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라는 것보다도, 이런 얘기도 있죠. 마음이 가난하다면 정말 가난하게 사는 법이고 마음이 풍부하다면 정말 풍부하게 사는 법이다, 이런 거요. 그러니 여러분은 마음을 가난하게 두지 마시고 우울하게 두지 마시고 항상 보람 있게, 또는 항상 생동력 있고 겸손하게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하세요. 그 지혜가 무기가 되어 굴리는 살림살이를 해야만 앞으로 풍부한 살림살이가 될 뿐 아니라 대인으로서 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 전체에 공헌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로써,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항상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법이 된다는 얘깁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옛날에 가져온 그 비극적인 역사 이런 거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좀 새로이 새 맛이 나는 역사를 가져올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생각을 함부로 내지 마세요. 개인적으로 어떤 원한이 있더라도 일일이 요렇게 찍어서는 열쇠를 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포괄적으로 생각해서 세계적으로 너무 높은 거는 낮추고 너무 낮은 것은 올리고 하는 그 마음, 한마음의 도리에 지혜로운 폭넓은 마음, 그런 큰 그릇의 마음을 낼 수 있는 그 뜻을 갖는다면 그대로 진행이 될 겁니다. 그럼 세계 평화가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북통일도 될 수 있고요. 마음을 다루면 몸도 다룰 수가 있거든요. 세계를 움죽거리게 하는 것은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애욕에 대해서


스님께 애욕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도 이르시기를 애욕보다 더 광대한 건 없다고 하셨고, 애욕이 이 세상에 하나만 더 있어도 성불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그러셨습니다. 과연 애욕은 극복되어질 수 있는 과제인지요?

그래요. 만약에 당신이 없다면 어떻게 애욕이 있겠소, 당신 자체가 없는데.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게 당신이 앉아 있는 겁니까. 더불어 같이 앉아 있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상대가 있습니까, 자기가 없는데. 자기가 내세울 게 없는데 어떻게 애욕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그거는 피어난 꽃들의 움죽거림에 연관을 시키면 그거와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함이 없이 했고 가고 옴이 없고요.
그래서 가고 옴이 없이 여기도 올라왔지 않습니까? 누가 올라왔어요? 발자취도 짊어진 게 없고 또 몸속에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했기 때문에 올라온 거지, 껍데기가 어디서 생겨서 올라왔어요? 알고 본다면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거지 자기 혼자 한 게 하나도 없어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다 자기 혼자만이 보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자기가 심부름을 해서 더불어 같이 돈을 번 거지, 내 거라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모두가 같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 더불어 한 거지, 어떻게 자기 혼자만 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돈 나갈 데 안 나갈 데 다 나가 버리고 말죠.
천주교 자리든 만주교 자리든 불교 도량 자리든 한 도량이고 한 지구의 생물들이에요. 그러니까 하여튼 원천적인 근본을 우리가 보고 마음을, 지혜를 내야지 소소한 거, 이 다섯 손가락이 있으면 이 손가락 하나를 보고 손가락이라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지금 얘기한 것대로 여러분이 그게 무슨 희한한 기적이다 이런 게 아니라 인간에겐 다 자동 컴퓨터와 자동적인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다 주어져 있는데 자기가 쓸 줄을 몰라서 못 쓰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람도 그렇고 비도 그렇고, 모두 직결이 돼 있고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 수레바퀴하고도 더불어 같이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마음만 내면 즉시 빛보다 더 빨리 전달이 된다 이런 거예요. 마음으로 쓰는 건 그렇게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냥 모든 걸 묘법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그대로 정상이에요, 그게. 우리가 마음으로는 이 구정물을 깨끗한 물로 바꿀 수가 있지만 이 물체로는 그렇게 우리가 그냥 바꿔 놓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예를 들어 물이라 하면 물하고도 통하니까 마음으로는 얼른 그게 바꿔지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마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깐 제대로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길 수도 없고, 맡기지 못하니깐 방황하게 되고 방황하니깐 일이 잘 안되고 이런 거뿐이죠. 그러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올바른 진화를 할 수 있으려면…


과거의 업에 의해서 오늘의 내가 있고, 이생에서 심은 습에 의해서 미래가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둔한 저희들은 아직도 마치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업이란 무엇이며 우리의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올바른 진화를 할 수 있는지, 영(靈)과 불성(佛性)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영(靈)이라는 것과 불성(佛性)은 다릅니다. 영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모습 없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불성은 아닙니다. 혼(魂)이라는 것도 영을 혼이라고 합니다. 영혼(靈魂) 이렇게 하죠. 그러나 그 영혼이라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릇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그 그릇에 따라서 작은 그릇이면 작은 그릇의 영혼일 것이고 크면 큰 대로의 영혼일 것입니다. 불성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갖가지로 다르게 마음을 내는 것 즉,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는 데 비유해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이렇게 하는 것을 이름 붙여서 영혼이라고 하죠. 그 영혼 하나가 만사를 잘못되게 할 수도 있고 잘되게 할 수도 있죠. 영혼이 불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되고 잘되는 거를 이끌어 가는 그 자체가 돌고 돈다는 뜻이죠. 그래서 영혼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 불성이라는 자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돼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 우주에 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불성에 이끌려서 우리도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돌아가면서도 꿈쩍도 않는 것입니다. 돌아가면서도 돌아감이 없는, 더하고 덜함도 없는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내 마음의 그릇이, 그릇 없는 그릇이 있어야 한 찰나에 드셔서 묘법의 설법을 하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런 게 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과거가 미래고 미래가 과거고 미래에서 볼 때는 현실이 과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거에서 다시 올 때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쪽에서 볼 땐 여기가 과거고 여기서 볼 때는 그게 미래입니다. 우리가 정신세계의 차원을 삼차원으로 볼 때, 영혼이 잘못된 일들을 했을 때에 자기 그릇대로 노는 것입니다. 생명은 다 똑같습니다마는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반면에 악도 있고 선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옥황상제가 지배인이라면 그 지배인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즉 악이 선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지배자가 될 양으로 그 정신세계에서도 싸움 아닌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가 문제가 되느냐. 지금 현실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에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이 부부가 참 좋은 아들을 달라고, 이 세상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다 자비하게 사랑하면서 이끌어 주는 그런 아들을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빌고 나서 아들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랬는데 아들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혼자서 아들을 기르다가 얼마 안돼서 어머니마저 죽어 버렸습니다.
그 엄마는 정말이지 부처님한테 진심으로써, 항상 마음의 인등을 켜면서 염원하다가 그대로 앉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턱 가 보니까 너는 지금 낳은 아들을 또다시 가서 낳아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이 성해서 이 세상이 모두 혼란이 온다고, 그러니까 너는 빨리 나가거라 그래서 또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 명을 받고 여자로 태어났는데 그 아들은 벌써 죽어서 미래의 세계로 갔습니다. 그래 미래의 세계에 가서 보니까 애당초에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각(覺)을 이룬 사람이라, 생시에도 그렇게 마음에 의해서 보고 듣고 하는 대로 미래의 세계로 전파를 보내고, 그러는 한편 미래의 세계에서도 그 사람이 있으면서 지배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계속해서 그렇게 나가야 할 텐데, 이 악에서 볼 때는 그 여자를 꼭 죽여야만 옥황상제가 또 지배를 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자를 죽이려고. 그 여자를 택해야만 그 영혼을 낳을 수 있고, 배를 빌려야 하니까. 그래서 여자를 죽이려고 무진 애를 쓰는데 선에서 그거를 알고선 또 이쪽으로 구하러 보냈습니다. 미래의 세계에서, 즉 말하자면 정신세계에서 이 여자를 보호하고 살려야 된다는 뜻을 청했습니다. 내가 지금 급하니 당신의 그 전자의 아들의 뜻을 바로 이리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는 자기가 대신 그 여자를 통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또 낳아 가지고 그 아들이 이제 이 세상을 간파했습니다. 보면서 들으면서 또 이 누진(漏盡)으로서 결정을 내면서 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또 연방 그렇게 살피는 동시에 한 찰나에 과거와 미래를 드나드시니 여기 가만히 앉아서 지배를 했다 이 소립니다.
그것이 부처님 세계의 한자리의 도리, 아주 차원 높은 도리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악은 선을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선의 주인공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살기가 어지럽게 됩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되니 이 몸뚱이 혹성이 많이 죽게 되고 살기가 극난해지죠. 불안을 조성하고 방황을 조성하고 또 싸움을 조성하고, 그러면 세상만사가 어지러워서 지구도 그렇고 모두 소멸되는 그런 작전이죠. 악이 지배를 하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거를 풀어서 지금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각자 너부터 알아야만 이 세상을 알고 이 세상을 알아야만 네가 그렇게 지배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여기 앉아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미래의 세계와 과거의 정신세계와 같이 한자리를 하고 돌아가니까, 너 나가 없이 같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돌아가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악을 전부 선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모든 걸 용광로에 다 넣으면 새 쇠가 아주 다양하게 나가듯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악도 선도 그렇게 다 넣어라 하신 반면에 ‘인연이 없는 중생은 어찌 할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은 자기가 마음을 잘못 내서 저절로 독사 소굴에 태어나는 걸 말씀하신 거죠. 그래서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옥도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고, 편안하게 자유 세상을 보내는 것도 이 자리에 있고, 부처도 이 자리에 있고 중생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재도 공했으니까 없다 한 그 뜻을 가르치는 것이 미래와 과거와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세상을 똑바로 이끌어 가기 위한 방편이자 실천이죠. 여러분에게 얘기했으니까 이제부터 마음내고 실천하는 것은 여러분 몫이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못사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지만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죽는다고 해결이 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못살고 가난하고 못나고 이런 게 억울하면 공부하셔야 됩니다. 내가 못나서 뭐 이렇고 저렇고 하지 마시고요, 못난 것도 한 찰나고 잘난 것도 한 찰나니까 그런 걸 다 그저 묵살시키시고 이 도리를 배우는 데 전념을 다하세요.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었대요. 미래의 세계에 들어가는데 이 주장자에 사탕같이 꿴 그거를 하나씩 다 들었더라는 거예요. 다 들고 들어가야만 한자리를 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기를 쓰고 증득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그렇게 애를 쓰면 오히려 모자라게 됩니다. 그러니 애를 쓰지도 말고 애를 안 쓰지도 말고, 그냥 생활하는 데서 여여하게 돼 가는 대로 ‘이것이 바로 내 한마음, 이 한마음 의식, 한마음으로 주인공, 주장자 이것이 자성본래불(自性本來佛)이니까 그대로 그냥 이렇게 해 나가고 있지 않나, 이끌어 주고 있지 않나. 그런데 내가 뭐 걱정이야, 보배가 나한테 있는데.’ 이럭하고선 부드럽게 편안하게 그냥 웃으면서 사세요.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늘까지는 사과를 심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이따가 요 시간 지나면 내가 저 아래 나가서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거 겁내고 살아 본 예가 한 번도 없어요. 이따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 할 일은 꼭 해야 되니까요. 뭘 그걸 두렵게 생각합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나 하나 버리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요. 여러분이 ‘내가, 내가 살아, 내가….’ 이러니깐 그냥 두렵고 모두가 그렇지, 내가 한다는 게 붙지 않으면 두려울 게 없어요.
예전에 깜깜한 그믐밤에 길을 가는데, 글쎄 이 내 마음의 스승이 도깨비가 왔다 갔다 하는 그 춘천 골짜기 물 내려가는 쪽으로 거길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이그, 내가 어차피 죽으려고 그랬는데 그깟 놈의 거 뭐 그게 두려워? 다 와라! 뭐가 있다면 다 와라!’ 그랬더니 가다가 보니깐 글쎄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거기에 목신이 있는 겁니다. 아, 인사를 깍듯하게 하지 않습니까? 아이고 참, 벗이 돼서 좋아서 말입니다, 나도 그 밑에 앉아서 혼자 싱그레 웃고 혼자 중얼거렸으니, 누가 봤더라면 “저 사람 미쳤군.” 그랬을 거란 말입니다. “아주 미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산중에 올라왔을까?” 그랬을 겁니다.
지금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요, 참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밤에 산비둘기 울음소리, 부엉이 울음소리, 능생이 울음소리, 새소리! 얼마나 좋았는지 친구가 됐죠. 그러니까 지금도 어디 가다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야!’ 그러고 그냥 싱긋이 웃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죠. 그게 다 친구들이고 벗이었어요. 도반이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같이 말할 수 있는, 그 뜻을 전달하고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도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또 미래 세계에 그 지배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한마음 부처가 되기 위해 지금도 공부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배인이죠. 그리고 지배인이 한자리 한마음으로 하는 거고, ‘부처는 하나다’라고 하는 건 부처가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그 용어를 붙여 놓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거 할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저거 할 때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부처가 없는 게 부처다 이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죽지 않는다면 죽은 세상을 어떻게 맛볼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죽는다면, 반쯤 죽는 게 아니라 아주 죽는다면 생산이 될 것입니다. 아주 죽는다면 다시 태어날 것이고 아주 죽지 못한다면 고생을 길게 하고 길게 아마 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판(理判)이다 사판(事判)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둘이 아닌 까닭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이판사판 아니겠습니까? 이래도 죽을 것이고 저래도 죽을 것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살 양으로 그렇게 애를 써야 하죠? 몸으로 죽으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마음이 죽는다면 몸도 항상 고개가 숙여지고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부드러운 말을 해 줄 수 있고, 남들을 이익하게 해 줄 수 있고, 일체 만법에 걸림이 없이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저 나는 이따가 죽든 내일 죽든 그런 건 상관없으니 나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길 바랍니다. 그냥 나 하는 대로요, 죽든 살든. 그것을 배우세요. 내가 죽든 살든 이따가 죽든 이따가 엎드러지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가 있다면 가루가 되더라도 한다고 그랬는데 내가 없으니까 가루도 될 게 없습디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여러분이 집에서나 나가서나 일하시면서나 항상 평상시가 그냥 참선이며 마음 편안하고 넉넉하면 좌선입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2006-10-28 오전 10:58:32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