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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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부 65강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 13/한국학중앙연구원
13장은 지금까지의 재즈식 설법을 총괄하여, ‘이름’을 부여한다. ‘금강반야바라밀’이 그것이다. 이로서 설법은 완성되었다! 그러고도 혹 오해할까 싶어 노파심의 당부가 이어진다.

원문
爾時,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以是名字,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卽非般若波羅蜜,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須菩提, 諸微塵,如來說非微塵,是名微塵. 如來說世界非世界,是名世界. 須菩提,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卽是非相,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身命布施,若復有人,於此經中,乃至受持四句偈等,爲他人說,其福甚多.

초벌 번역
이때, 수보리가 부처께 사뢰되, “세존이시여, 이 위대한 경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리까. 그리고 어떻게 받들고 지키리이까.”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리밀’이라고 할지니, 이 이름으로 너는 마땅히 받들고 지키라. 왜냐. 수보리야,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하지만, 이는 기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기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여래가 무슨 설법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설하신 바 없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삼천대천세계의 먼지들, 이들은 많겠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수많은 먼지들, 이라고 여래는 말하지만 이들은 먼지들이 아니다. 그래서 먼지들이라고 한다. 여래는 수많은 세계를 말하지만, 실은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세계라고 부른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가히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을까.”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냐 하면, 여래가 설하신 32상은 상이 아닌데, 그래서 32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사 같은 목숨을 보시로 내놓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 중에 사구게라도 수지하고, 그것을 다른 이를 위해 설하면, 그 복이 더욱 성대하니라.”

보완 번역
이때, 수보리가 부처께 사뢰되, “세존이시여, 이 위대한 경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리까. 그리고 어떻게 받들고 지키리이까.”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리밀’이라고 할지니, 이 이름으로 너는 마땅히 받들고 지키라. (이 명명은 다만 임시적이니 썼다가 너는 지워야 한다.) 왜냐. 수보리야, 부처(인 내)가 (지금) 반야바라밀이라 하지만, 이는 기실 (실체로서의)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전제로 내가 지금)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내가 부르는 모든 이름, 세속의 것이든 영원의 것이든 마찬가지이다.예를 들면,)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여래가 무슨 설법한 바, (그것을 통해 듣고 얻은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설하신 바, (즉, 그것을 통해 듣고 얻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하다. 잘 이해하고 있구나.) 수보리야, (더 물어보자.) 네 생각에 어떠냐, 삼천대천세계의 먼지들, 이들은 (무수히) 많겠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수많은 먼지들’이라고 (나와 선배) 여래(들)이 말하지만 이들은 (기실) 먼지들(로서의 실재성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즉, 그 조건 하에서 내가 지금 방편으로) ‘먼지들’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여래는 수많은 ‘세계’를 말하지만, 실은 (그것들은)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세계라고 (방편으로) 부른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가히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을까.”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냐 하면, 여래가 설하신 32상은 (기실 실재하는) 상이 아닌데, 그래서 32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잘 이해하고 있구나,) 수보리야, (그렇다. 정말 그렇다. 네가 지금 깨달은 이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사 같은 목숨을 보시로 내놓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 중에 (핵심) 사구게를 수지하고, 그것을 다른 이를 위해 설파하면, 그 복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크고 성대하리라.”

부연 해설
- 지금까지 긴 문답을 들었다. 그 가르침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나 보다. 수보리는 취지를 충분히 알겠다면서, 그 ‘독특한 가르침’에 이름을 짓자고 청한다. 붓다는 거기 ‘금강반야바라밀’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그래놓고도 미심쩍었던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온 ‘오해를 피하는 법’을 노파심으로 다시 틀어준다.
- 붓다는 여기 <금강경>에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정리해보자. 탁발을 마치고, 붓다를 둘러앉아 들은 그 ‘불교’는, 초장부터 상식은 물론이고, 승단의 통상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다. “내가 그동안 혀를 두드려 가르친 바 ‘불교’는, 그대들의 그릇된 자아의식을 부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그 가르침이 담긴 책을 신성한 장소에 보관하여 경배하지 말라. 희망을 주기 위해 약속한 여래 또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수보리는 처음 이 혁명적 선언에 경악했다가, 그 가르침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된 붓다의 파트너 제자였다. 수보리는 고개를 들고, “나야, 그렇다 치고, 이 말을 곧이 들을 자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오랜 500년들의 쇠퇴기를 거친 말세의 중생들이 붙잡고 있는 희망의 등불이 못내 걱정이었던 것이다.
- 붓다는 이 부정과 부재의 선언이야말로 말후구(末後句), 불교의 진정한 희망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사즉필생, 생즉필사(死卽必生 生卽必死), 일전을 불사해야 전쟁을 막고, 허공에 발을 내딛어야 길이 생기듯이, 외물(外物)에 기대는 바가 없을 때,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동력의 자유와 힘을 얻는다.
- 이렇게 듣고 보니, 이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지 아니한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바로 그것이다. 만해는 세속의 시적 감성으로 <금강경>이 설파하는 ‘최상승’의 역설을 은유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만해가 <불교대전>의 저자이자, <조선불교유신론> 그 휘황한 고금(古今)의 문체로 혁명적 취지를 설파한 ‘승려’였다는 것을 근본 간과하고, 그를 오로지 <독립운동가>로서만 기억하는 바람에 <님의 침묵>을 편파적으로 해설해 왔고, 그 바람에 경강부회 또한 적지 않았다. <금강경>의 코드로 <님의 침묵>을 다시 읽어 보자.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중략)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2006-10-28 오전 10: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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