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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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참된 열반이란/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계율이 잘 지켜져야 고요한 선정의 힘이 길러지니 이 선정에서 나오는 지혜가 바로 부처의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 ‘불생(不生)’이라 하고, 이는 고요한 선정으로서 헛된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무념(無念)’이라 한다. 또한 이 무념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이니 ‘열반’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그 자리가 열반인데도 중생들은 이 열반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이 열반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킨다.
<선가귀감> 45장에서는 이 집착을 깨뜨리고자 참된 열반에 대하여 말한다.
修道證滅 是亦非眞也 心法本寂 乃眞滅也. 故曰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참된 열반이 아니다. 마음이 본디 고요한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열반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모든 법은 본디부터 늘 언제나 고요하다”라고 말한다.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는 것에서 말하는 열반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말하는 열반이다. 깨달음을 얻어 생사 자체가 열반이 되면 모든 차별이 사라져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열반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열반을 추구하는 ‘주체’와 열반이라는 ‘객체’가 사라진 이 자리는 본디 고요한 마음으로서 어떤 법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모든 법은 본디부터 늘 언제나 고요하다”라고 말한다. 모든 집착이 사라져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이 자리야말로 ‘참된 열반’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眼不自見 見眼者 妄也. 故 妙首思量 淨名杜默
자신의 눈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의 눈을 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생각할 것이 없는 곳에서 생각으로 헤아리고, 유마 거사는 침묵할 것이 없는 곳에서 침묵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눈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는 것[眼不自見]”은 무엇을 말하는가? 생사니 열반이니 하는 개념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인연들이 모여 허깨비처럼 만들어진 것인데 ‘깨달음’으로써 이 허깨비들이 사라졌으므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열반의 성품은 원래 비고 고요하여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어도 불공(不空)의 공덕이 있어 인연 따라 모든 일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 바탕 그 자체는 본디 공(空)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처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는 것[修道證滅] 역시 인연을 좇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생사니 열반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허깨비와 같다[非眞]. 비유하면 자신의 눈이 본디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 ‘참된 열반’의 성품 그 자체가 평등이어서 생사니 열반이라는 차별로써 열반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참된 열반’은 마음과 경계가 일여(一如)하여 능소(能所)로 드러날 것이 없어 이를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한다.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한 법문이다. 그리고 이 ‘둘이 아닌 것[不二]’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 곧 ‘참된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의 개념이 상대적이니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아 양쪽의 집착을 완전히 여의어야 이것이 곧 ‘참된 열반’이다.
그렇다고 ‘참된 열반’이라는 것에 또 집착하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邊見)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양쪽을 여의어 양쪽 자체를 찾아볼 수 없고 ‘참된 열반’이라는 것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열반’에 또 집착하게 되면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成佛)했다고 하여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니다. 실제로 중도를 깨달아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不有]’은 중생들이 경계로 나타나는 색(色)에 집착하나 색(色)이 본디 공(空)이어서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不無]’은 색(色)이 본디 공(空)이라고 하니 중생들이 공(空)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空)에 대한 집착’을 부수는 것이다.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둘을 파(破)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破)함이니, 유(有)도 파하고 무(無)도 파하며 색(色)도 파하고 공(空)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中道)인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반 또한 공(空)이다. 불교에서 늘 말하는 것이지만 양쪽의 집착을 완전히 여의면서 나타나는 열반에 집착하면 그것은 열반을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실로 양쪽의 집착을 여의면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서 열반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위해 억지로 할 수 없이 ‘공(空)’이요 ‘중도’며 ‘참된 열반’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지 그것들 자체는 실제로 공(空)이어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문수보살은 생각할 것이 없는 곳에서 생각으로 헤아리고, 유마 거사는 침묵할 것이 없는 곳에서 침묵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불이법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무엇보다도 <유마경>을 손꼽을 수 있다. 천태 스님도 여러 저서에서 불이법문을 논할 때는 특히 <유마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자주 거론하였다. 천태 스님도 서산 스님처럼 <관음현의>에서 “문수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정명은 입을 막음으로 불이문을 삼는다[文殊 說無說爲不二門 淨名 杜口爲不二門]”라고 하였다.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없으며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 것도 아니다. 생사와 열반 양변의 집착을 떠난 중도 자리, 곧 부처님 마음자리에 들어가 마음이 본디 고요한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열반이다.
2006-10-28 오전 10: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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