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그걸 맞는 사람은 ‘김·이·박(金·李·朴)씨’라는 우스개 소리가 전해온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많다는 말이다. 중국에는,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에서 보듯 장(張)씨와 이(李)씨가 가장 많은 모양이다. 이씨는 두 국가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는 통계적 영광을 안았다. 장삼이사(張三李四)란 말은 ‘장씨의 세 번째 아들과 이씨의 네 번째 아들’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크게 배운 것 없이 신분적으로도 평민인 그들은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이다. 〈경덕전등록>에서 이 평범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빛나게 묘사돼 있는 경우를 용흥 유(龍興 裕)선사 말에서 찾아낼 수 있다. 용흥 유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학인의 본래자기입니까(如何是學人本來自己)?”
이는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인가’ 하는 바로 그 질문과 다르지 않다. 선사의 답변은 당연히 평범함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니라.”
선어록 곳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대혜종고 선사의 법문에도 평범한 노파이야기가 나온다.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지하천(無知下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선사께서 법문하는 날, 마침 담주 선화현 행정책임자로 있던 요등관(寥等觀)자사가 참석한 것이 눈에 띄었다. 따라서 들으라는 듯 그 동네에서 있었던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 할머니는 걸식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했다. 그야말로 의지할 핏줄 한 점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믿고 의지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금강경>이었다. 항상 금강경을 외우며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산기슭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동네처마 밑에서 이슬이라도 피하려고 하면 그 집주인들이 모두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금강경을 외우면서 탁발하러 다니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그 할머니가 해가 지면 돌아갔던 그 위치에 갈가마귀떼가 몰려들어 울어댔다. 무슨 일인가하여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그 할머니가 가슴에 금강경을 품고서 바위 앞에 죽어있었다. 까마귀들이 흙을 물어다가 그 노파를 덮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선종의 소의경전인 금경경의 수지독송 공덕을 이름없는 평범한 노파가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살아서 도인’도 있고 ‘죽어서 도인’도 있는 법이다.
이번엔 장삼이사의 진짜 장씨 이야기이다. 장덕(張德)은 이발사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찰에 물건을 공급하는 일을 가업으로 해왔다. 그 인연으로 시간만 나면 참선을 했고 자주 사람들을 따라 법문을 들으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이 훤해옴을 경험하게 한다. 스스로 깨친 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까닭에 주변사람들은 ‘한 소식’한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펑펑 내렸다. 그 때 아이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흰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이를 기특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문득 게송 한 수를 지었다.
꽃 한송이가 여래를 받들고 나타났는데/ 육근(六根)의 표현이 원만하고 눈가에는 미소까지 머금었구나/ 하지만 해골이 원래 물인줄 알았더라면/ 마야부인 태속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을.
바늘 만드는 정(丁)씨는 천태지방 사람으로 서암사 방산(方山)선사에게 인가를 받았다. 그가 남겨놓은 선시가 있다.
놓든지 잡든지 간에
한 줄기 신령스런 빛이 천지를 비추네.
흰 눈과 맑은 거울을 빌려와 이치를 밝혀놓은 두 작품은 모든 한 경지에 이른 게송이라고 하겠다. 송(宋)의 대혜종고 선사와 명(明)의 무온서중(1309~1386)선사가 이 글을 굳이 기록으로 남겨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그들이 평민이라는 신분때문에 깨달음의 경지까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등록〉에는 이렇게 비꼬아 말하고 있다.
“불법(佛法)을 알고자 한다면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물어보고세간법을 알고자 한다면 고불총림(古佛叢林)에 들어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