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각자 여러분의 뿌리를 진짜로 믿어야!
여러분의 몸 하나 하나가 여래의 집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스님의 귀한 설법에 감사 올립니다. 저는 부산에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주대학교 법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혹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몇 달 전에 저의 딸애가 부모와의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렸을 적에 스님께서는 저희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시고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시며 사람이 태어나서 만나는 인연법, 윤회법을 가르쳐 주시고 저희 가정이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시 거듭해서 그 높으신 은혜에 감사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평소 스님의 설법에 항상 감복하고 깨달은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생활 참선 혹은 관법에 대해서 몇 가지 의정을 갖고 있는데 소박한 마음으로 이 궁금증에 대해서 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관법을 잘 익히라고 하십니다. 일반 승가에서는 조주 선사의 ‘무(無)’자 화두나 ‘이 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경향에 비해서 스님께서는 다른 화두는 일체 주지 않으시고 오직 주인공만을 화두로 삼으라고 하심이 곧 생활 참선이요 관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평소 생활하는 가운데 주인공을 믿고 일체 그 자리에 맡기고 지켜보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늘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연 이것이 제대로 잘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가끔 하게 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 받기를 원합니다.
또 한 가지는 보통 우리 일반 불자 가정에서는 한마음 공부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서 카세트테이프나 혹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설법을 듣거나 혹은 불경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아침에 카세트로 설법을 듣고 출근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하루 일과를 매우 충실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바쁘다 보면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 하고 그냥 뭐 대충 듣기도 하고, 마음자리에 관하지 않고 건성건성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과 이렇게 귀한 진리의 목소리를 틀어 놓고 듣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까 스님께서 설하시기를 생명 있는 모든 의식들이 다 주인공의 지휘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했는데 혹시 나는 의식이 그 설법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다른 의식들이 그 설법만큼은 어떤 감응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소박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도 스님의 큰 가르침이 있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럴 것이고 저렇게 생각했다면 저럴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한테 ‘꼭 마음공부를 하셔야 된다. 각자 여러분의 뿌리를 진짜로 믿어라. 마음으로는 그 몸을 다스리면서 행동하셔야 되고 안으로는 믿고 가셔야 됩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카세트를 놓고 듣는 것은 물리를 틔우고 지혜를 얻고 모든 그 사물의 이치를 완전히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듣고 누가 지금 살림을 하고 누가 다니고 있습니까? ‘누가 보고 누가 듣고 있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듣는 놈은 누구고 보는 놈은 누구고 하는 놈은 누구고, 아니다 하는 놈은 누구고 그렇다 하는 놈은 누구입니까? 바로 각자 여러분입니다.
▲질문자1(남):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 그리고 또 아까 화두 얘기 하셨는데, 옛날에는 화두를 주면 그냥 마음으로 직결해서 들어갔는데 지금은 안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를 내다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화두를 줬다, 어느 스님이 화두를 주셨다 이런다면 벌써 그 스님한테서 화두를 받았다는 생각부터 앞섭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두가 진짜로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항상 겉으로 화두가 끊어질까 봐 애를 쓰면서 쩔쩔매고 오히려 더 겉돌아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온 게 화두인데 남한테서 또 화두를 받아 가지고 한다면 그 화두가 겉돌지 않습니까? 그러니 공부는 아예 하기 틀렸죠.
▲질문자2(남): 이렇게 좋은 날 먼 길을 왕림하시어 부산 불자들을 위해 감로법을 설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는 질문에 앞서 스님께 부탁 아닌 부탁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달마 조사께서는 280세, 단군 할아버지께서는 117세를 사셨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성자 바바지께서는 600세를 사셨다고 합니다. 또한 현재 히말라야 산맥 주변에 거주하는 성자들은 500세 이상을 생존해 계시면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님, 무시무종이라고 합니다만 심봉이 바로 서지 못해 정신세계의 맛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저로서는 스님께서도 현 법체를 500세 이상 유지하시면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철부지 어린애가 떼쓰는 것 같을지라도 한마음 내 주시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오로지 저희들을 위해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스님: 하이구! 우리가 말입니다, 영원히 사는 겁니다, 영원히. (대중 박수) 삼천 년 전의 석존이 되든 단군 할아버지가 되든 누가 되든 여기 이 자리에 여러분이 계신 한 여러분이 다시금 변장하고 다시 나온 것이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죽었다 하는 것이 죽는 게 아니라 바로 옷을 빨아 입으려고 벗어 놓고 다시 새 옷을 입는 거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돌아갑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대중 박수)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요. 참, 형제같이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스님이 되고 한 사람은 사회에서 그냥 살았는데, 사회에서 사는 사람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좋은 데로 천도나 좀 시켜 달라고 그 친구 스님을 불렀더랍니다. 그러니까 친구 스님이 와서 하는 말이 “에이, 오지나 않았으면 가지나 않을 것을….” 그러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아니, 살지 않았으면 죽지나 않을 걸….’ 하는 소리와 똑같은 얘기죠.
그러니 그 말을 한번 거꾸로 생각을 해 본다면 영원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죽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한 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현실에 다시 나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허탈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때 반드시 돈을 주고 물건 값에 해당하는 거를 사 옵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줬다고 하며 또 그쪽에서는 내게 물건을 줬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받은 새가 없고 너도 나를 준 새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정확하고 그렇게 아주 빈틈이 없는 것이며 생활인 것이며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 무시무종 이 자체가 바로 그대로 우리가 지금 하고 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시느라고 걸어오셨겠죠? 그런데 누구를 봐도 발자국을 모아서 걸머지고 온 분 하나도 없네요? (대중 박수)
▲질문자2(남): 이제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님: 허허허….
▲질문자2(남): 스님, 오늘 설법 도중에 이미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만 준비해 온 질문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한마음선원에 오게 되면 다른 사찰과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우선 법당부터가 불상 한 분만 모셔져 있고 장엄물이 적습니다. 또 관음재일 지장재일이니 하는 기도나 금강경 강의나 다른 경전 강의 하는 것을 못 봤고 오직 한마음 주인공을 관하라고만 하십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스님: 만약에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가 둘 셋이라면 그거 참 골치 아프겠지요? 허허허…. 어머니가 둘 셋이라도 골치 아픈 일인데 아버지가 둘 셋이라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바로 하나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만사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삼라만상이 전부 하나로 돌아가며 그 하나마저도 공했다 했습니다. 아까도 ‘내가 나라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 했죠? 그러니까 모두 내면으로도 나 아님이 없고 외부적으로도 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왜? 보십시오.
어떤 회사를 경영하는데도 직원이 없으면 사장이 없을 것이고 사장이 없으면 직원이 없을 것입니다. 직원과 사장이 어떻게 둘입니까? 네?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없어도 아니 되고 마음내는 게 없어도 아니 되고 육신이 없어도 아니 됩니다. 마음내는 게 없으면 목석이고 생명이 없으면 무효고, 육신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또 손가락 하나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지금 뭐라고 했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죠? 하하하…. (대중 웃음, 박수)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지금 이 말을 하고 가죠?
▲질문자2(남): 우리 한마음선원 법당에는….
▲스님: 네, 그래요! 참, 그렇군요. 하하하! 그래서 모두가 아주 쉽게 인식하고 가게 만들려면 아버지 하나면 족합니다. 아버지 하나면 족하듯이 바로 부처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수천수만 분이 깨쳤다 하더라도 평등공법 봉, 봉에 같이 모든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주둔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따로 부처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높고 낮음이 없이 한마음으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평등하다는 그 뜻으로 바로 여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몸 한 체 한 체가 여래의 집입니다. 바로 이 속에 있는 모든 자생중생들이 화하게 되면, 바로 제도가 되면 그 여래 집 안의 여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냥 깨치면 그냥 여래지요, 여래의 집이고요. 그리고 또 외부로 따진다면 따로따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같이같이 맞물려서 모두가 같이 돌아가지요. 생각을 해 보세요. 세상을 내다보세요. 하나나 혼자 살 수 있는 세계인가. 독불장군으로 혼자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북하면 무시무종이라고 했을까요.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질문자3(여): 스님, 감사합니다. 오분향 설명을 하실 때에 스님과 부처님께 누가 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부끄럽게 생각한 것을 오늘 스님 법문 자락을 붙들고 좀더 정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7월 말에 봉정암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길인데다가 듣기로는 일곱 시간이 걸린다, 뭐 너무 힘들다, 깔딱 고개가 어떻다 이래서 ‘갈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래서 ‘아, 이게 내가 가는 게 아니고 주인공이 가는 거 아니냐. 주인공이 가자! 근데 주인공 그 자리에서 축지법은 못 쓰더라도, 벌써 왔나 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거다. 주인공이 해!’ 이렇게 하고 백담사에서부터 출발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가면서 제 나름으로 의문이 생기길 ‘봉정암에 사리를 친견하고 무슨 복을 달라고 기도하러 가는 것은 아닐 거고 주인공이 가기는 가는데 나에게 무엇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내 나름으로 의문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6월인가 7월 셋째주 법회 때 스님께서 ‘제발 직코스로 들어가라’ 하신 그 말씀이 생각이 나서 ‘그래, 주인공! 직코스로 들어가자. 오늘 직코스로 들어가서 내가 봉정암 사리탑에 가면 사리를 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삼천 년 전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마음을 볼 수 있게 해! 주인공이 가르쳐 줘!’ 이렇게 하고 올라갔습니다. 계속 ‘직코스로 들어가자, 주인공!’ 하면서 갔는데 정말로 아직 더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퉁이를 도니까 다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하, 이거였구나! 축지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쉽게 올라올 수 있었고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가져온 의문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이 나한테 가르쳐 줄 것!’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법당에 들어가서 삼배를 하고 탁 돌아서 나오는 순간에 마침 풀숲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올라왔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그래, 삼천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늘 이 부처님과 다름이 없고 모두 한마음 주인공이라면 너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닐 것이 아니냐, 주인공. 다람쥐, 넌들 나하고 다르겠느냐. 한마음이라면 네 얼굴 한번 보자.’ 이렇게 제 마음속으로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다람쥐가 가다가 탁 멈추는 겁니다. 그래서 그 등에 대고 ‘그래, 보여 줘. 정말로 한마음이라면 보여 줘. 네 얼굴 한번 보자.’ 이렇게 하니까 다람쥐가 얼굴을 탁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람쥐를 보면서 ‘아, 그래 고맙다. 가르쳐 줘서 고맙다.’ 이렇게 하는 순간에 다시 다람쥐가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한마음이라는 것, 그러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신 풀 하나라도 둘이 아니라는 그런 것이구나 하고 제 나름대로 이제 환희심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한 1주일쯤 지난 뒤에 꿈을 꾸는데 꼭 이와 같이 제가 마이크를 들고 스님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스님, 제가 봉정암에 갔거든요….” 이렇게 하면서 지금 한 이야기를 이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제 생각에 ‘정말 내 주인공에 관한 것이 직통으로 통했을까?’ 하는 못 믿는 구석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을 했습니다. 근데 오늘 마침 질문의 기회가 있어 스님 말씀을 한번 듣고 싶어서 제가 경험했던 이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아마 제가 믿는다 하면서도 혹시라도 못 믿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
▲스님: 이거 보세요. 지금 우리가 작년에 수박을 심어서 먹고 씨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올해 그 수박씨를 심어서 수박이 또 됐습니다. 근데 작년 수박하고 올 수박하고 다릅니까? 그게 다르지 않습니다.
▲질문자3(여): 예.
▲스님: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다르다는 거와 같이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씨가 그 씨고 그 수박이 그 수박이니까요. 삼천 년 전 부처님의 마음이나 지금 현재의 여러분의 마음이나 둘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은 체가 없어서 우리가 지금 금방 이 자리에 앉아서 집에 갔다 오시라면 갔다 오실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앉아서도 뭐가 어디 있고 뭐가 어디 있고 통장은 어디다 뒀고, 하하하…, 밥통은 어디 있고 똥통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렇게 묘하게 지구 밖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바로 물주머니에서 나와서 물주머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물주머니에서 살고 있다는 거는 어항 속에서 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모든 자생중생들을 제도하고 위로는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나고, 일체제불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게 항상 찰나찰나 서로가 통하고 이렇게 삶을 살면 우린 작년이 따로 없고 올이 따로 없고 내년이 따로 없습니다. 모습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고 화하고 또 변하면서 이렇게 자꾸 바꿔 가며 살고 있습니다. 별성도 또 자기 몸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살고 있고 우리도 역시 자꾸자꾸 바꿔 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생각을 어떻게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하고 말을 어떻게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미래의 오늘에 오는 그 모습은 짐승의 모습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사람의 몸으로 살다가 짐승의 몸을 가져올 수도 있고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 사람의 모습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마음과 마음을, 항상 자기를 잘 이끌어 가는 채찍이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아까 그 다람쥐 얘기를 하는데요, 한번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삼천 년 전에 있는 부처님의 마음을 알려 다오.’ 그랬으니 그 다람쥐가 보였다 하더라도 살았다는 걸로 아셔야 됩니다. 지금도 살고 계시다는 거를 말입니다. 네? 그 다람쥐의 모습을 보지 말고 다람쥐가 움죽거리고 살았다는, 지금도 현적(顯跡)하게 부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거를 아셔야 됩니다.

▲질문자4(남):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귀한 시간 내 주셔서 정말, 오늘 여기 오신 신도님들을 대표해서 다시 한 번 감사 말씀 올리겠습니다.
항상 우리 신도님들은 법문을 굉장히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 실천 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을 때는 깊은 감명 감동을 가지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듣고 갑니다. 그러나 돌아서 나가면 그 행이 이루어지질 않고 저버려집니다. 그래서 우리 신도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과 아울러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천이 되고 지속적으로 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 주셔서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게끔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 절에 많이 다니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하나도 안 해 주고 만날 그저 이 말 저 말 끌어다 대서 말을 한다고 그러실는지도 모르지만, 부처님께서 전자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지금 현재의 용어로 바꿔서 얘기해 드린 거지 그게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시고, 지금 여러분이 먼저 여러분부터 아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삼천 년 전에 그러셨고 사대 성인들도 그러셨어요. “너부터 알라.” 했습니다. 달마 대사도 그 소리 했다고 약사발을 받고 소크라테스도 약사발을 받았습니다만 내막을 본다면 그분들만 그렇게 약사발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아까도 얘기했죠. 우리 육신이 나무라면 뿌리는 그 나무 밑에 있다. 그러니 나무 밑에 있는 뿌리한테 믿고 맡겨 놔라 이겁니다.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해 주시오’ 하면 벌써 둘이 돼요. 그러니까 ‘너만이 낫게 할 수 있다.’ 이런다면 금방 약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게 화합니다. 그래서 나투어 줍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로 인해서 관한다면 관세음이 돼 주고 신장이 돼 주고, 아까 얘기했듯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나투어 주십니다. 그러면 안에서 자생중생이 화해서 그렇게 보살의 나툼으로 응신이 돼 주십니다. 그러면 안에서 깨달음도 있고 물리도 터지고 지혜도 생기고 또 생활하는 데도 이익하게 돌아가고,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어서, 자기 뿌리를 믿지 않고 딴 뿌리에다 들이대고 기도하지 말고 내 뿌리에다 들이대고 ‘너만이 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것,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 모든 것을 ‘너만이 할 수 있고 너만이 낫게 할 수 있고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고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고….’ 하고 맡기세요. 모두 거기다가 맡겨 놓으시고 ‘너만이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믿는다면 아주 그냥 밝아지지요. 생활이 윤택해집니다.
그렇게 알아야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을 알 수가 있고 골수도 알 수가 있고 일체 중생들의 마음도 알 수가 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도 알 수 있고, 이 세상을 모두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위 법문은 1993년 10월 10일 부산대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6-10-23 오전 11:16:40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