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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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2부 64강 12장 자심(自心)의 수지독송(受持讀誦)/한국학중앙연구원
금강경은 어디 있는가?

11장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은 무엇이라 했던가.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은 은하계들을 다이아몬드로 도배한다해도, 그 보시 복덕은 ‘이 경전’의 글귀 하나 들려주는 공적에 까마득히 못 미친다고 했다. 이어 지금 12장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은 “대체 이 경전의 한 구절이 그토록 위대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응답 혹은 해명이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이 경전의 글귀가 있는 그곳에, 육도의 상승에 위치하는 존재들, 즉 천상과 인간은 물론, 아수라들까지 우르르 일어나 찬탄의 노래를 부르고, 다투어 꽃과 음식으로 공양을 올릴 것이다. 흡사 차이티야, 붓다의 탑묘가 있는 성스러운 곳을 경배하듯이….
(2)한 구절만 해도 그러할 진대, 이 경 전체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할 수 있다면, 그 성취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최고의, 희귀한 진리의 성취자’가 될 것이다.
(3)‘이 경전’이 있는 곳이 곧 부처가 있는 곳이며, 위대한 제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물어보자. 여기서 말하는 ‘경전’은 <금강경>의 문자 혹은 책인가? <금강경>의 한 구절을 읽어주는 것으로 일체의 천인 아수라들이 다투어 공양을 하며, <금강경> 전편 32장을 펼쳐 독송하는 것으로 최상의 희유한 진리를 성취하게 된단 말인가? 이 물음은 ‘문자’와 ‘진리’ 사이의 변증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영원의 화두이다.

<금강경>, 위대한 경전
<금강경>은 신비로운 경전이다. 한자의 난해로 인한 아득함에, 서방 인도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주는 이그조티시즘(exoticism), 거기에 반복되는 역설의 어법이 겹치면 <금강경>은 지극히 신비로운 위광을 띠게 된다.
반복되는 역설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한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그래서 지혜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위대함은 기실 위대함이라 할 수 없다. 바로 그런 까닭에 내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식은 이들 기이한 어법을 납득하지 못해 저만큼 달아나거나 비난했고, 종교적인 사람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 경전 앞에 큰 절을 올렸다.
그러나 여기 유의할 것이 있다. “이 경전이 있는 곳에 곧 부처가 있으며, 그곳은 일체의 천인 아수라가 지극한 공양을 올린다”고 했다. 물어보자. 그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란 대체 어디인가.
저쪽에 모셔져 있을 때, <금강경>은 다른 여느 잡지나 교과서와 별로 다를 바 없다. 하여, 여기서 말하는 ‘이 경전이 있는 곳’이란 <금강경>의 메시지가 알려지고, 체화되고, 전달되는 그 어디쯤일 것이다. 그 공간은 <금강경>이라는 문자를 ‘통해’ 보여지긴 하지만, 종국 <금강경>이라는 문자를 떠난, 선가의 비유를 들면 활발발(活潑潑)한 지점일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
지금 찌를 질러놓자면, <금강경>이 계속 “-는 -가 아니다. 그래서 -라고 한다”라는 어법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그리고 그 유명한 ‘뗏목의 비유’도 <금강경>의 책자의 권위만 믿고, 정작 중요한 메시지의 습득을 소홀히 할까 싶어 우려한 경계의 말씀이다. 그 노파심의 극단에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이 발흥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시는 사태이다. 만해 또한 그 전통을 따라 “<금강경>은 먹으로 쓰여진 책 위의 문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선의 중흥자이자 실질적 창시자인 육조 혜능은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취지를 장악하는 방법을 권유했다. 예컨대, 소승과 대승에 대한 그의 정위는 이렇다. “소승(小乘)은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메는 사람이고, 중승(中乘)은 문자의 취지를 대강 캐치한 사람, 그리고 대승(大乘)은 바로 그 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최상승(最上乘)은? 그는 바로 그런 노력조차 필요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혜능의 분류대로 하자면, 소승에서 대승, 그리고 최상승으로 올라서는 바로 그곳이 ‘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다시 혜능의 비유를 빌리자면, “<금강경>에 휘둘리지 않고, <금강경>을 굴리는” 자리가 바로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금강경>의 수지독송
진정한 수지독송은 <금강경>을 나침반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의 취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수용하여, 거기 따라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수지독송일 것이다. 혜능이 말한다.
所在之處, 如有人卽說是經, 若念念常行無念心, 無所得心, 不作能所心. 說若能遠離諸心, 常依無所得心, 卽此身中有如來全身舍利, 故言如佛塔廟. 以無所得心說此經者, 感得天龍八部, 悉來聽受. 心若不淸淨, 但爲名聞利養而說是經者, 死墮三途, 有何利益. 心若淸淨而說是經者, 令諸聽者除迷妄心, 悟得本來佛性, 常行眞實, 感得天人阿修羅, 人非人等皆來供養持經之人.
“주변에 혹시 누가 있으면, 이 경전을 설해 주라. 념념이 언제나 무념심(無念心)을 살라고…. 무소득심(無所得心),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부작능소심(不作能所心), 내 욕심과 편견으로 세상을 가르고, 사람을 차별치 않는 마음으로 살라고... 마음의 둔탁한 찌끼들을 제거하고, 무소득의 마음을 토대로 살 때, 이 하찮은 몸에 여래의 전신 사리가 가득차게 된다. 그래서 지금 (경전이 이 사구게를 지니는 자리가) ‘부처의 탑묘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소득의 마음을 가진 자의 설법은 천룡 팔부를 감격시키고, 그들이 다투어 이 위대한 가르침을 듣도록 만든다. 하나, 청정치 않은 마음으로 이름과 이익을 노리고 이 경전을 설하는자, 그는 죽어 세 악도에 떨어지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청정한 마음으로 이 경전을 설하는자, 그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미망심(迷妄心)을 제거케 하고 본래의 불성을 깨닫도록 하며, 늘 진실(眞實)을 행케 하고, 천인 아수라를 감격 격동시키는 신비한 힘을 행사한다. 그래서 사람이건 사람이 아니건 모두 와서 이 ‘경전 가진 자’를 공양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무성한데, 실행이 없다면 그것을 어디다 쓸 것인가. 5%의 실천으로 기업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얘기들 들었다. 외기만 하고, 취지를 모르는 소승의 삶, 취지는 알되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중승의 삶으로는 진정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몸으로 읽는 <금강경>
혜능이 그 ‘체득’을 다시금 강조한다.
自心誦得此經, 自心解得經義, 更能體得無著無相之理, 所在之處 常脩佛行, 念念無有間歇, 卽自心是佛, 故言所在之處卽爲有佛
“내 마음으로 이 경전을 외워 얻고, 내 마음으로 이 경전의 취지를 이해하여 얻고, 다시 능히 무착(無著)과 무상(無相)의 이치를 몸으로 체화하여 얻는다. 서 있는 자리에서 늘 붓다의 행동을 닦음에, 한 순간도 틈이 지지 않을 때, 자심은 곧 부처가 된다. 그래서 ‘서 있는 곳이 곧 부처가 있는 자리’이라 했던 것이다.”
<금강경>의 수지독송은 다시 말하지만, 경전의 취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몸에 새겨 기억시켜나가는 자심(自心)의 작업이다. 그 체득을 위한 고투의 현장이 바로 ‘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그 땀과 피를 향해 인천 아수라들이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꽃을 흩뿌려 공양할 것이다.
혜능은 여기서도 돈교의 진실을 거듭 강조해 마지않는다. 그때 “너는 진정 부처이다(自心是佛)!
2006-10-23 오전 10: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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