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없던 가을 가뭄과 더위 탓으로 가장 먼저 현란한 색채들을 뽐낼 올해 강원도 단풍이 곱지 않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좀 늦기는 해도 이미 백두대간의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서부터 서서히 물감 질이 시작되었다.
짙거나 혹은 옅은, 붉은색 주황색 노랑색으로 수놓아지는 단풍은 ‘고독한 가을’이란 이미지를 여지없이 날려 버린다.
사람들은 붉은 단풍에 고무되고 주황이나 노랑색 단풍 색깔에서 위로와 안정을 찾는다고 색채 심리학자들은 말하지 않는가. 단풍의 과학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냉혹한 과학은 인간의 정서나 감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노랑이나 주황 등의 단풍 색깔은 잎 속의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남아 있는 색소가 공기에 노출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만 붉은 색의 경우 전혀 다른 과정을 밟을 뿐 아니라 다른 종의 식물을 자라지 못하도록 독을 분비하는 이른바 ‘아름다운 킬러’라고 과학자들은 이름 붙인다. 붉은색 단풍나무의 경우 변화하는 계절에 적응하려고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생성한 안토시아닌(Anthocyanin)성분을 땅속으로 스며들게 하여 다른 수종의 생장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한편 가을더위라지만 고니 기러기 시베리아 까마귀 등 겨울 철새들도 어김없이 찾아오기 시작해, 텃세 심한 텃새인 까치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배타적 기질이 심한 까치는 철원 파주 쪽으로 날아오는 덩치 큰 시베리아 독수리의 눈도 파먹어 치운다는 텃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머리 좋은 시베리아 까마귀도 예외가 될 수 없는지 벌써부터 그 행로를 두고 곳곳에서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정서적 단풍이든 과학적 단풍이든 강원도 고성 금강산 끝자락에 해당하는 남한의 천년고찰, 금강산 건봉사에도 그 단풍은 이미 시작되었고 까치와 까마귀의 기(氣)겨루기도 목격되고 있다.
신라 불교 도입 초기에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 가운데 하나인 건봉사는 지금 휴전선과 맞닿은 민통선 안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사찰 가운데 하나다. 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다. 규모로도 한국 최대 사찰이었던 건봉사의 역사를 보면 전란과의 악연과 폐허가 쓸쓸하고 슬프다. 사찰 입구에 사명대사 좌상을 크게 조성해 놓은 것을 보면 사찰과 호국불교와의 인연도 짐작케 한다.
아도화상, 도선국사, 나옹선사 등 시대마다의 덕망 높은 대덕들과의 인연은 물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가져 간 부처님 진신 치아 사리를 거두어 이곳에 봉안 했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오래전부터 폐허위에 시작된 불사가 지금은 제법 규격을 갖추었다. 북한 금강산을 다녀 온 관광객들이 이곳을 둘러서 가기도 한다.
분위기는 참으로 평화스럽다.
최근 북한의 느닷없는 핵실험은 그 평화스러움에 얼마간의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철새들의 비상을 보는 텃새 까치의 긴장감과는 성질이 다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왜란이후 사명대사께서 부처님 진신치아 사리를 왜 이곳에 안치하셨을까? 분단의 가장 민감한 곳에 자리 잡은 건봉사의 오늘을 내다 보셨을까?
건봉사의 평화는 곧 이 땅의 평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