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행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부처님의 계율(戒律)을 지녀야 좌선할 때 마음이 고요해지는 선정(禪定)이 생기고, 이 고요한 선정으로 인하여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지혜(智慧)가 생긴다. 먼저 지혜가 있고 나서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먼저 선정에 들어가고 나서 계율을 지닌다는 것은 옳은 이치가 아니다. 선정이 없는 지혜는 참다운 지혜가 아니고, 계율이 없는 선정은 참된 선정이 아니다. 계율이 아니면 선정은 완성되지 않고 선정이 아니면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선가귀감> 38장부터 41장까지는 참선을 하는 수행자라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계율을 잘 지켜야 마음이 편안해져서 선정의 힘이 길러지고, 이 선정의 힘에서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지혜가 싹트는 것이다. <선가귀감> 42장에서는 말한다.
無碍淸淨慧 皆因禪定生
어떤 것에도 걸림없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 지혜는 모두 선정에서 생겨나느니라.
맑고 깨끗한 부처님 지혜가 생겨나는 선정에 대해 이 게송의 출처인 <원각경> 변음보살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보살이 지녀야 할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 지혜’는 모두 선정에서 생겨난다. 이 선정은 ‘사마타’ ‘삼마발제’ ‘선나’를 말한다. 이 세 가지 수행하는 법을 ‘단숨에 깨치는 법’과 ‘점차 닦아 나가는 법’으로 나누어 분류해 보면 스물다섯 종류가 된다.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수행자들도 이 법을 실천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분들이 없다”
선정에서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은 ‘깨달음의 자리’에 이른 것이니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정은 ‘사마타관(奢摩他觀)’ ‘삼마발제관(三摩鉢提觀)’ ‘선나관(禪那觀)’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이 세 종류의 관법(觀法)에 모든 수행의 바탕이 들어있으니 그 내용을 정리해 보겠다.
첫째 ‘사마타관’이란 부처님의 세상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고요한 경계’를 취하여 점차 수행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이 수행을 하면 어지러운 생각들과 번거로운 알음알이들이 사라진다. 이 자리에 밝은 지혜가 생겨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들이 사라지니 그 안에서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이 생겨난다.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이 그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다.
이렇게 수행하는 방편을 ‘사마타관’이라고 하며 ‘정관(靜觀)’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마타’는 고요하고 고요하다는 ‘적정(寂靜)’의 뜻을 갖고 있다.
둘째 ‘삼마발제관’이란 부처님의 세상을 먼저 이해하게 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 이 세상 모든 경계가 ‘인연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는 허깨비와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연의 실체를 아는 지혜로운 마음이 허깨비와 같은 경계들을 제거하게 되면 수행자는 그 과정에서 편안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 힘으로 중생계의 잘못된 흐름을 부처님 세상으로 바꾸면서 고요한 마음과 밝은 지혜를 잃지 않는 이 방편을 ‘삼마발제관’이라고 하고, 환관(幻觀)이라 말하기도 하며 ‘위빠사나’라고 하기도 한다. ‘삼마발제’는 모든 법이란 인연이 모이면 허깨비처럼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깨비처럼 사라진다는 ‘변화(變化)’의 뜻을 갖고 있다.
셋째 ‘선나관’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세상을 알고 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나타날 뿐, 실체가 없는 허깨비와 같은 줄 알아 집착하지 않고, 또한 이 세상 모든 경계가 사라진 고요한 모습조차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고요한 경계를 취하는 ‘사마타관’이나 이 세상 모든 변화의 실체를 아는 ‘삼마발제관’의 경계를 뛰어넘고, 깨달음에 걸림돌이 된다거나 되지 않는다는 상대적 경계조차 영원히 초월하는 것이다.
부처님 세상에서는 번뇌와 열반이 서로 걸림돌이 되지 않듯,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몸과 마음이 중생의 영역에 있더라도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적멸(寂滅) 가운데서 고요하고 편안한 부처님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깨달음으로서 ‘적멸’의 경계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는 곳이니 이 방편을 ‘선나관’이라고 하며, ‘적관(寂觀)’이라 말하기도 한다. ‘선나’는 모든 번뇌가 사라져 고요하다는 ‘적멸’의 뜻을 갖고 있다.
대충 정리해 보면 ‘사마타관’은 색(色)이 곧 공(空)임을 알고 허망한 것을 버리고 공성(空性)인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선정이고, ‘삼마발제관’은 공(空)이 곧 색(色)임을 알고 법계(法界)에서 일어나는 연기법(緣起法)으로써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선정이다.
‘선나관’은 이 두 가지 경계를 동시에 이루면서 이 두 가지 경계를 뛰어넘어 중생의 영역을 초월하려는 부처님의 선정이다. ‘선나’의 ‘적멸(寂滅)’에서 ‘적(寂)’이란 사마타 ‘적정(寂靜)’의 ‘적(寂)’과 같고, ‘멸(滅)’이란 삼마발제 ‘환멸(幻滅)’의 멸(滅)과 같으니, ‘선나관’ 속에 ‘사마타관’과 ‘삼마발제관’이 녹아 있는 것이다. 서산 스님은 이런 선정의 힘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超凡入聖 坐脫立亡者 皆禪定之力也. 故云 欲求聖道 離此無路
범부가 성인이 되고 앉아서 죽고 서서 죽기도 하는 것은 다 선정에서 나오는 힘이다. 그러기에 “성스런 도를 찾으려면 선정을 떠나서는 다른 길이 없다”라고 한다.
선정을 잘 닦은 사람들은 ‘좌탈입망(坐脫立亡)’을 한다고 한다. ‘좌탈(坐脫)’은 앉아서 죽는 것이요 ‘입망(立亡)’은 서서 죽는 것이다. ‘좌탈입망’이란 선정의 힘이 깊어지면 육신의 생사에 자유자재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앞서간 고승들이 고통 없이 편안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은 다 선정의 힘 때문이다. 부처님의 온갖 지혜와 덕행도 모두 이 선정의 힘에서 나오니, 성스런 부처님의 도를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선정을 닦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