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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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놔라! 다 놓게 되면 그냥 훌렁 벗어진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똑바로 진짜로 믿으세요!

고를 해결하는 마음자세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고 믿음을 구할 때 우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그 인연의 줄을 잡고 공부도 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어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법에서는 좋고 나쁨을 놓아야 한다고 하지만 자력이다 타력이다를 떠나서 고를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을 어찌 잘못됐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러면 더디 가는 것이고 그것은 기필코 빠르게 가는 길이 못됩니다. 내 주인공은 내 보디가드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때나, 즉 말하자면 아프거나 그래서 관하면 의사로 찰나에 바뀌어지고 또 어떠한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이 되고, 좋은 데로 간다 하면 지장이 돼 주고, 칠성 부처가 돼 주고 지신이 돼 주고, 용신이 돼 주고 허공신이 돼 주고 별거 별거가 다 돼 줍니다.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는데 뭐가 답답해서 그렇게 바깥에 가서 물어야 합니까. 그렇게 물으러 다닐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바쁜데. 지금 바빠 죽겠어서 말을 하는데 얼른 자기한테 하는 게 다 빠르지 나가서 하는 게 빠릅니까?
말하자면, 자기한테는 곧바로 그냥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가서 하는 것은, 그렇게 듣느냐 안 듣느냐도 문제지만 올바로 나가는 게 못되고 또 빠른 길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와 나가, 나와 나가 항상 그렇게 빠르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나와 나가 더 빠르지 누가 더 빠릅니까? 여북하면 “정히 답답하면 ‘야, 아무개야!’ 하고 자기 이름을 자기가 세 번 부르고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아귀를 지어라.” 하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말소리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길에 가다가도 하고 앉았다가도 하고 섰다가도 하고, 누구하고 같이 있다가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무슨 급한 일이 있을 때 그렇게 해서 통신을 하게 되면 그냥 재깍, 재빨리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렇게 빠른 것을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게 부처님의 직속, 즉 말하자면 통신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아니라면 제삼자가 자기를 대신 살아줄 리 없고요. 그러니깐 여러분 개개인이 자기 아닌 자기를 꼭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렇게 통신을 해야 합니다.

깨어나게 해 주세요!


곧 추석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올 한 해도 이렇게 침체된 상태로 지나가는구나. 나는 왜 발전된 삶을 살지 못하고 침체되어야만 하는가. 내가 하는 이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니 너무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초발심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는지 좀 깨어나게 해 주세요.

그것도 마음입니다, 그것도. 마음은 광대무변해서 마음을 너희들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쓰고 살아라 하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내놨다고요. 아, 그런데 왜 마음을 자유스럽게 쓰지 못하고 그렇게 침체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는 답답하게 생각하고, 얼른 공부가 안돼서 답답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나요, 예?
과정 없는 현실이 없듯이,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나온 자리를 알아야 하고, 나온 자리를 알아야 가는 자리를 알고, 가는 자리를 알아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자리를 알아요. 그러니 열심히 선원에 다니면서 같이 공부해 가는 도반들과 토론도 해 가면서, 스님들께 질문도 해 가면서 자꾸자꾸 물어서 따라가 봐요. 먼저 공부를 시작했고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를 했고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는 것대로 놓고 모르는 건 모르는 것대로 놓고, 놓고 지켜보고 실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바로 그대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관해 보고, 인간 세상에서 말하고, 가고 오면서 지켜보고, 그런 게 모두 참선이라는 뜻이에요. 이 마음자리에서만이 일체 만법이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하는 거니까요. 그것을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체험을 안 한다면 그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모든 것을 습득을 해서 모든 관습을 놓고 실험을 하는 겁니다, 하나하나. 알고 보면 상당히 쉬운 일인데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뭘 그렇게 알아야 하고 따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배웠고 잘났고, 똑똑하고 못났고, 못하고 못 배웠고 이런 거를 몽땅 다 놓는 겁니다. 놓는 거라고 하니까 놓는 거에 또 걸리지 마십시오. 내 육체를 나라고 하거나, 내가 했다고 하거나, 내가 가졌다고 하거나, 모든 걸 나라고 일으켜 세운다면, 모두 둘로 보이기 때문에, 상대로 보이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가 연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겁니다. 그리고 업이 녹질 않아요. 과거에 입력된 것이 살살 나오는 위에다 또 자꾸 업을 지어서 미래에 나오게끔 입력하는 겁니다. 지금 입력하는 것은 미래에 가지고 나올 것을 미리 저장을 하는 거죠. 저장 아닌 저장이죠. 여러분이 그 업을 안 지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건 자동적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각자 자신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육을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 내 신을 두고 남의 신을 찾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자신(自神)을 두고! 자신은 정신계에 속하고 육은 현실계에 속하는 겁니다. 항상 육은 끌려다닙니다, 마음의 주인한테. 그러니 잘못 돌아가는 거는 거기다 되놓고 잘 돌아가게 해서 서로가, 누가 더 높고 얕음이 없이 상통하면서 같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같이 작용을 하는데, 지금 유심(有心)에서는 도저히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데 작용을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그렇게 가고 있으니 그걸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뭣고? 이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 되는 거지! 이게 틀리지, 이게 옳지!’ 이런다면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믿고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이끌어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따져야 하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따져 봤자죠. ‘이렇게 해야 맞지, 저렇게 해야 맞지!’ 하고 자꾸 잔소리가 심하고 이론이 많아지고 그런다면 전자와 전자가 어떻게 마주 붙어서 불이 들어옵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려고 드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좀 심사숙고해서 여러분은 진짜로,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고, 자기 주먹만을 믿고 주먹에서 나오는 거 주먹에다가 도로 놓는 마음!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 지닌 한자리, 그것이 그 주먹 아닙니까?
아리송할 거예요. 그렇지만 그대로 그렇게 해 보세요. 자기 차원은 자기가 알게 돼 있습니다. 누가 알려 주는 게 아닙니다. 자기 차원은 자기가 자꾸자꾸 알아집니다. 그러니 그저 보고 듣고 생활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똥을 누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한 찰나에 그냥 거기 놓으세요!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침체돼 있든 침체돼 있지 않든 그것도 다 자기 마음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한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무명의 근원지?


무명의 근원지가 어딘지요. 우리가 다 본래 부처라면 무명이 과연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건지요?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해봐도 저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봇장이 울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깐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마는, 지수화풍이라는 말을 부처님께서 왜 자꾸 하셨고 우리도 왜 자꾸 하느냐면, 이게 지금 전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습니다. 근데 그 지수화풍이, 즉 말하자면 바람과 흙과 물이 한데 합쳐서 혼합이 되니까 온기가 생겼어요, 그 불이. 온기가 생겨서 그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면 생명의 근원지는, 딴 데 가서 찾지 않고 그 근원지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몸으로 낳게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몸속에 우리가 역대를 거쳐서 진화돼서 올라온 그 자체의 근원지를 보라고요. 바로 인연에 따라서, 그 근원지에 미생물에서부터 모든 모습들이 갖가지로 그 몸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리고 나올 때 물주머니로 나오게 만들었죠. 어떻습니까? 이 몸이 지수화풍의 근원지라고요.
우리는 지수화풍의 근원지를 가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아요, 또.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이 세계가 발달할 수도 없고 세계가 연구할 수도 없거니와 바로 우리가 지금 과학이라는 그 소리가 안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끝간 데 없는 진리가 될 수도 없거니와 이 불교가 풀 한 포기만 살아도 불교가 그대로 있다는 그 사실을 아마 모를 겁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여러분 몸뚱이 속에 의식들이, 생명들이,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생명들은 전자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대로 그 부모를 정하게 돼 있거든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정해집니다. 그것이 금 차원이라면 바로 금방에 탄생이 될 거고, 또 무쇠 차원이라면 무쇠전에 무쇠로 탄생이 될 거고, 넝마라면 넝마전에서 넝마로 탄생이 될 거고 이렇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게 돼 있죠.
그거는 왜냐하면 악업 선업의 인연들이 바로 내 몸뚱이 속에 주둔을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영혼과 더불어 같이 정자 난자를 빌려서 탄생을 시키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이거든요. 그래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진화시키고 탄생시켜 온 장본인이 바로 여러분의 주인공 주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장이라고도 하고, 주장자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참부처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그렇게 이름은 많죠.
그런데 모든 것은 이 마음을 통해서 그 업식에서 나오는 것을 여러분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컴퓨터에 넣어 놓은 그 입력이 바로 나오는 겁니다, 그냥! 그러니까 ‘나오는 대로 다시 되집어 넣으면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인공에 되놓으라고 항상 하는 소립니다. 되나오는 것을, 잘 나오는 것은 ‘응, 참 잘 나오게 해서 감사해.’ 하고 놓고, 또 잘못 나오는 것은 ‘너만이 잘 나오게 할 수 있어.’ 그러고 거기다가 되넣는 겁니다. 되입력을 하는 거죠. 되입력을 해야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자꾸 들어가는 거죠. 그래야만이 그 유전성, 업보성, 인과성, 세균성, 영계성 이 다섯 가지가 다 무너지게 됨으로써 이 내가 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부처인 자유인이 되려면 내 자생중생들부터 바로 조복을 받아라, 항복을 받아라 이 소리죠. 그것도 강제적으로 항복을 받는 건 항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인의롭고 유유하고 자비롭고 지혜롭게, 나오는 모든 것을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되놔야만 다시 입력이 돼서 그게 없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없어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거기다가 되놓으라는 것, 지금 여러분한테 이끌어 주는 관법이 그대로 그겁니다. 내 내면의 자생중생들부터의 그 의식이 본래 부처 자리인 마음의 선장과 더불어 한마음이 돼야 배가 지나가는데도 뒤집히지 않듯이, 그렇게 해야만 파도가 쳐도, 아무리 뇌성벽력이 쳐도 배는 잔잔하고 편리하고 평등하게 잘 건너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을 덧붙여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태초에서 1년 전은…


기독교에서는 태초와 종말이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어서 시간을 규정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 볼 때는 과연 그렇다면 태초에서 1년 전은 그럼 뭐냐 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그리고 또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영원의 1년 후는 그럼 또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세계는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초라는 게 오늘이 태초죠, 뭐. 영원한 오늘이 태초예요. 그전에 언젠가 한 목사가 와서 자기네는 태초를 몇천 년 이렇게 거슬러 올라간다 합디다. 그래서 “그건 당신네들이 사는 데에 몇 년, 몇천 년 이런 게 있지마는 태초를 왜 거슬러 올라가느냐. 당신이 이 세상에 나와서 당신이 알았으면 당신이 안 것대로 태초지, 그걸 왜 거슬러 올라가느냐. 당신이 그 시절에 알았느냐. 그런데 지금 나와서 보니까 모두 이렇게 태초라는 것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바로 태초야. 그 시간부터 태초다 이거야.” 그랬죠.
그리고 천당을 가고 무슨 지옥에 떨어지고 그런다는 얘기를 하면서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기에 그랬죠. “당신이 귀신 노릇을 하면 귀신이 있는 거고 당신이 귀신 노릇을 안 했으면 귀신이 없는 거지.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기 때문에 귀신도 있고 선신도 있는 거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는데 무슨 귀신이 있고 선신이 있느냐. 사람들이 만들어서 귀신이다 선신이다 하는 거지, 만들지 않았다면 선신이나 귀신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 없는데 귀신이 있겠느냐, 사람 없는데 예수가 있겠느냐, 하느님이 있겠느냐. 당신들이 지어 놓고 귀신이다 뭐다 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모두가 이렇게 돌고 돌고 또 돌고 또 태어나고 또 돌고 이러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윤회한다고 하죠,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생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게 윤회가 아니라 그대로 자유자재예요. 그렇다고 해서 무슨 여기만 꿇어 박아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만 꿇어 박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자기가 나고 싶은 데에 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중세계라고 하는 데는 부처님이 천 년 만에 한 번, 나고 싶으면 나고 말고 싶으면 마는 데예요, 여기가. 그러니까 천만분지일로 말입니다.
요게 예를 들어서 비교하자면 요렇게 요렇게 비벼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그 가루 하나, 먼지 하나 떨어뜨리는데 그게 금방 떨어뜨렸는데 천 년이 걸린 겁니다, 여기는. 금방 가루를 만들어서 먼지 하나 떨어뜨렸는데 글쎄 여긴 천 년이 됐다니까요. 그만큼 여기에서는 가피력을 그렇게 못 받는, 즉 말하자면 교차로에서 자기네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주는, 즉 말하자면 허리띠를 매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세계가 된 거죠. 그러니까 체로 칠 때 무거리 치죠? 인제 이렇게 가루를 또 치지 않습니까? 그때에 필요한 교차로예요, 여기 이게.
그러니까 우리 이 중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기를 했어요, 맛을 봤어요, 보기를 했어요? 도대체 물질화돼 있는 이 교차로에서 그런 맛을 못 보니까, 이 세파 속에서 그냥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다가 그 착에, 선의 착이든 악의 착이든 그냥 그 착에 둘둘둘둘 말려 가지고, 몸이 없어져도 그게 그냥, 그 마음이 그대로 거기 집중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 놔라 이겁니다. 다 놓게 되면 그냥 훌렁 벗어진다 이겁니다. 내 몸에도 착이 없고 어떠한 물질에도 착이 없고 아무것에도 착이 없어야죠.
그렇다고 해서 물질을 버리라는 건 아닙니다. 아, 쓰는 건 쓰지 왜 버립니까. 버리지 않아도 착을 두지 말라 이겁니다. 영원한 게 아니지 않느냐는 얘깁니다, 다 변질이 되고. 물질을 새 거 사다 놓으면 나중에 헐어서 버리게 되고 다시 바꾸게 되는 건데 구태여 거기다가 착을 둘 게 뭐 있느냐 이거예요. 그냥 쓰는 대로 써라 이겁니다, 착을 두지 말고. 금은보화를 갖다가 장속에다 넣었다 하더라도 거기 착 둘 게 하나도 없어요. 자기가 공했는데, 자기도 변질이 되는데 거기 그렇게 착을 둘 게 뭐 있겠어요. 그냥 놓고 관리인으로서 그냥 쓸 뿐이지.
아이구, 이런 걸 놓고 사니까 좋고 저런 걸 놓고 사니까 좋고 우린 이렇게 땅을 가졌으니까 좋고, 이런 돈을 가졌으니까 좋고 권리가 좋으니까 좋고…. 다 이건 거품과 같은 겁니다, 거품. 한순간의 거품이에요. 그 거품을 알았다면 우리가 한순간 살아나가는 동안에 참다운, 인간의 참이라는 걸 알고 나갈 때 비로소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일일이 속여 가면서 자기가 자기를 속임을 받고 속임을 주고 하니까 남한테도 속죠.
그러니 우리가 어떠한 것을 따르고 진실하게 믿어야 하느냐.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자기 찾을 권리도 있고, 자기가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권리도 엄연히 주어졌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예 꿈에라도 형식적인 고깃덩어리를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이름을 믿으려고도 하지 마시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똑바로 진짜로 믿으세요.
항상 얘기했듯이 싹이 뿌리를 그냥 믿는 거지 어떻게 남이 믿어라 믿어라 이래서 믿는 겁니까, 네? 자기 종성(種性)을 진짜로 믿어야죠. 항상 말씀드리는 거와 같이, 대신 죽어 줄 사람도 없고, 아파 줄 사람도 없고, 잠을 자 줄 사람도 없고, 똥 누고 밥 먹고 해 줄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제각기 자기 모습 속에서 자기를 알게 되면 자기도 공생(共生)이요, 공심(共心)이요, 바로 공체(共體)요, 공용(共用)이요, 공식화(共食化) 하고 우리 모두가 같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저에게는 돈이 붙지 않나요?


돈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인지요? 왜 저에게는 돈이 붙지를 않고 나가기만 하는 것인지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너무 쪼들리게 사는 것은 몸도 마음도 궁색해지는 것 같아서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만 죽을 때는 몸뚱이도 다 놓고 갑니다.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어떤 사람이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됐어요. 그런데 늙어서 몸이 쇠약해지고 죽을 때가 돼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세상에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어요. 그래, 돈은 많고 그러니까 마누라 셋을 더 얻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누라 넷과 살다가 둘째 마누라더러 그랬죠. “여보! 당신, 나 가는 데 같이 갈 수 없겠소?” 하니까 “천만의 말씀을요. 어떻게 같이 갈 수가 있어요? 난 못 갑니다.” 그러더랍니다. 또 셋째 마누라한테 그러니까 천부당만부당하다고 따르지 않더랍니다. 넷째 마누라한테 그러니까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화장을 하면 화장터까지만 가 주고 또 묘지를 쓸 것 같으면 묘지 쓰는 데까지만 내가 가 주지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랬답니다. 세상에 마누라 셋한테 다 물어봐도 그러니, 둘째 마누라더러 그랬죠. “야, 세상에! 내가 너를 추우면 추운 대로 따뜻한 걸 입히고, 더우면 더운 대로 시원한 걸 입히고, 아프면 아픈 대로 쓰다듬어 주고 약을 먹이고, 또 배고프면 밥을 주고 이랬는데도 나를 따라가지 않으니 이 허무한 마음은 어디다 비할 수가 없다.” 하면서 셋째 마누라더러도 그랬죠. “내가 먹지 않고 입지 않고 그냥 동서남북으로 뛰면서 벌어다가 그렇게 주었건만, 세상에 내가 갈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느냐?” 하니까 마누라가 하는 소리가 “당신이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따라다녔지 내가 당신이 좋아서 따라다닌 건 아니지 않느냐.” 이거예요.
그런데 첫째 마누라한테 그 말을 하니까 “여보, 당신이 나를 등한시하고 본체만체했어도, 당신이 본체만체하건 말건 그렇게 같이 왔으니까 같이 가야죠.” 그러더랍니다. 본체만체했어도 둘이 아니게 같이 있었던 거는 생명과 그 분별, 즉 말하자면 의식이라는 얘깁니다. 이 육체와 같이 나로 인해서 당신은 항상 같이 있었지 않느냐 이겁니다. 나를 등한시는 했었지만 그렇게 같이 왔으니까 같이 가겠다 이겁니다.
그게 무슨 비유냐 하면 둘째 마누라는 내 몸뚱이를 말하고, 셋째 마누라는 돈을 말하고 넷째 마누라는 자식들을 말한 거죠. 자식들이 뭐 화장터밖에 더 갑니까? 첫째 마누라는 내 주인공을 말한 겁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집이 좋고 또 마누라가 있고 자식이 있어도 대신 아파 줄 놈도 없고 대신 똥 누어 줄 놈 없고, 또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대신 잠자 줄 수 없고 대신 죽어 줄 수 없어요. 이 다섯 가지는 누구라도 대신 못해 줘요.
그러니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어느 땐가 제가 아침 공양을 하지 않고서 어디를 가는데 시장기가 드니까 골이 아파요. ‘야, 골이 아프구나! 골이 안 아파야지.’ 하고 쓰다듬어 주는 이 고마움! 여러분은 그 고마움을 모르죠? 내 손이, 내 마음이 나를 위한다는 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죠? 누구도 모릅니다, 그건. 아무리 부부지간에 절친하다 못해 천하없어도, 부모자식지간이라고 해도, 효녀 효부라 해도 다 소용없어요. 진짜 자기한테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아요. 섭섭하게 해도 섭섭하다는 말 못하고 그네들을 위해서 그냥 “응, 그래. 그래, 참 잘한다.” 하고 말하거든요. 모든 게 그렇고요.
여러분이 그렇게 믿고 능력을 기르면 돈이 없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파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가난하든 부자든 탐심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 억만 냥을 내가 지고 있어도 관리인이지 그거를 탐착하고 있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으니까 돈이 자꾸 오죠. 돈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거든요. 그러니 내가 쫓아다니지 않는다면 오지만 자꾸 쫓아가면 자꾸 달아나가요. 이상한 마음들이죠, 모두.
그러니 여러분이 낚시질을 해도 좀 잡히게 해야지 마음을 조급하게 내면 고기가 낚싯밥을 먹지를 않아요. 조급함이 없이 인내 있고 믿음직하게 하시면서 자기 몸 바깥에서 찾지 마시고, 자기가 콩싹이라면 그 콩싹에 콩씨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진짜로 거기서 세세생생에, 올해만 사는 게 아니라 내년도, 그 콩씨로 인해서 나고 또 나고 또 나고 또 나듯이 그렇게 사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콩씨가 팥씨도 될 수 있고 팥씨가 콩씨도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6-10-09 오전 1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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