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의 언어는 흔히 ‘격외(格外)도리’라고 말한다. 기존의 상식적인 틀을 깨어버린 파격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선사들을 ‘출격(出格)대장부’라고 부른다.
이번에 중국 사천성 보현성지 아미산에서 며칠 머물 수 있는 인연이 닿았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발견한 것은 그 파격적인 절이름들이다. ??사(寺) 내지는 ??암(庵)에 익숙한 우리의 고정된 틀을 사정없이 부수어버렸다. 하긴 인사동에서 낙원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어떤 요정은 ‘??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 우리 바람과 상관없이 그 이름은 그렇게 세간 사람에 의하여 파격적으로 사용되고 있긴 하다.
아미산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 암자는 ‘금정(金頂)’이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거대한 보현보살상과 큰 전각은 금빛으로 번쩍거린다. 범어사 뒤에도 금정(金井)이 있기는 하다. 지리산에서 가장 풍수전망이 좋다는 금대(金臺)라는 이름도 생각났다.
걸어서 해 질 무렵에 도착한 곳이 ‘세상지(洗象池)’였다. ‘세상야월(洗象夜月)’이라고 하여 아미산 십경중의 하나라고 할만큼 달빛이 기가 막히다고 하는데 날씨가 도와주질 않는다. 여기 이름은 보현보살께서 당신이 타고 다니던 코끼리를 친히 목욕시킨 연못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절 이름을 이렇게도 지을 수 있는 그들의 격외의식이 놀라울 뿐이었다. 한국의 오대산 계곡에는 문수보살이 나타나 세조의 등을 씻어주었다고 해도 그건 절이름으로 승화되지는 못했다.
대나무로 만든 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준다. 툇마루에 주루룩 앉아서 모두 바지를 둥둥 걷고 발을 담궜다. 피로회복에 그만이란다. 그런데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씻어주었고 문수보살은 왕의 등창을 손으로 씻어 낫게 해 주었다는데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 내 발은 어느 보살이 와서 씻어주나?? 동산양개선사 모친은 눈이 멀어 길에서 지나가는 납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발에 사마귀가 난 당신 아들스님을 찾으려고 했다는데….
이튿날 지팡이를 짚고서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내려와 하루를 묵은 곳은 홍춘평(洪椿坪)이다. 여긴 절 앞에 ‘홍춘’이라는 나무가 많고 골짜기 안에서 비교적 넓은 평지에 위치한 탓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노자〉에 몇 천년을 산다는 ‘홍춘’이라는 나무이름이 나온다. 그렇거나 말거나 절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슨 중국 요릿집 이름같다.
자장면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인천 차이나 거리에 있었다고 하던데. 이슬이 많아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비맞은 것처럼 젖는다는 ‘홍춘효우(洪椿曉雨)’가 크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팡이를 꽂으니 물이 나왔다는 전설을 품은 샘이 마당 한가운데서 물을 담고 있었다. ‘세상지’ 만큼이나 ‘홍춘평’도 절이름으로는 파격적이다.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버린 곳이 청음각(淸音閣)이다. 이름만 들어도 그 절 풍광이 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깎아지른 맑은 계곡위에서 듣는 물소리가 일품이었다. ‘개울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라(溪聲便是廣長舌)’고 하던 소동파의 시 그대로였다. 하긴 동파도 이곳 사천성 아미산 출신이 아닌든가.
세상지, 홍춘평, 청음각을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산도 산이고 물도 물이지만 그 현판의 이름들이 개산한 선사들의 파격적 안목을 대변해주고 있다. ‘금대(金臺)’로도 충분한데 ‘금대암(金臺庵)’이라고 불러야만 했고, 동굴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이름도 없으련만 그 동굴이라는 혈(穴) 마저도 뒷날 ‘혈사(穴寺)’라고 기록하는 ‘격내(格內)장부’들과 대비된다.
하긴 그렇다고 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금강산에 선원을 짓고는 ‘마하연’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았던가. 이름그대로 얼마나 방이 컸던지 이쪽 끝 쪽에서 정진하던 납자에게 저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한 철을 같이 살아도 누가 누군지 몰랐다고 하는 해방 전 이 땅 최대 수행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