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음식 문화를 조사하기 위해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城都)를 방문했다. 조사 연구의 성격상 계속해서 먹은 음식이 느끼한 터라 일행들은 커피를 마시고 싶어했다. 물론 식사 때 마다 나오는 중국차가 있었지만, 우리 입안을 개운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차로 가득 차 있는 중국의 거리에서 커피숍에 들어간 것은 문화적 충동이 가져온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실내는 약간 침침했고 실내장식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대로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커피 종류도 다양하고 값 또한 우리 돈 3000원 정도로 다른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커피숍 안에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인의 대중 음료가 되기까지, 또 세계 어디에서나 거의 비슷한 가격이 형성되기까지 커피는 많은 질곡의 과정을 거쳐 왔다. 특히 세계의 커피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브라질의 초기 농장주들은 대량생산을 위해 울창하던 숲을 벌목하고 불을 질러 땅을 개간했다.
그러나 이런 대량 생산 체제에 따른 과잉 생산은 가격 폭락, 농장주의 파산 등 국가 경제의 몰락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정부가 자율 시장경제에만 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해결책으로 국가가 차관을 도입해 직접 수매하는 방식으로 커피 가격을 조절하기도 했다.
1914년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브라질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커피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전쟁에 개입, 독일 증기선을 나포(拿捕)하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90%가 커피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브라질로서 중립이란 어려운 문제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유럽의 소비 증가로 잠시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듯했지만 유럽의 재정 악화는 커피 소비의 감소를 가져 왔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알콜 대신 커피를 마셨으며 이로 인해 미국은 브라질의 중요한 수출 대상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농장주들의 농원 확대, 커피의 풍작은 정부의 ‘가격 안정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정부는 더 이상 커피를 수매하지 않았으며 브라질은 ‘데페사’라는 커피 수호정책 후원회를 두어 세계의 커피 시장을 통제하였다.
‘데페사’는 레굴라도레스라는 창고를 만들어 농장주들에게서 커피를 수매하여 창고에 저장, 저장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 커피의 운송을 허가하였다. 공급의 균일화는 가격 폭락을 예방하였고 저장된 커피양은 비밀이 유지되어 더 이상 투기꾼들은 커피가격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데페사’는 재정적·심리적으로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농장주들은 계속해서 생산량을 늘려 재정적인 안정을 취하려 했지만 고품질을 생산할 수 없는 조건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커피의 증대는 질을 저하시켜 주변 생산국인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등의 질 좋은 커피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브라질의 커피는 또 다른 위기에 처한다. 1931년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산된 커피를 불 태워 수급을 조절한다.
커피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브라질에서는 국가 재정의 풍요를 위해 커피를 태우는 것이니 결국 귀하면 귀할수록 수요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가격이 높아져서 이윤의 극대화를 가져온다는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브라질의 커피정책은 이러한 경제 원리를 응용하여 커피를 태우는 의식을 치른 후 다시 커피의 왕국으로 태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