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戒律)이라는 표현에서 ‘계(戒)’와 ‘율(律)’이 같이 쓰이지만 그 뜻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계’는 지켜야 할 것을 가르쳐 주어 잘못을 막아 나쁜 짓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율’은 어떤 처신이 더 부처님 뜻에 맞는지를 알아 ‘계’의 쓰임새를 잘 알고 지키자는 것이다. ‘계’는 잘못을 쉽게 범할 수 있는 마음을 중생의 통제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고, ‘율’은 중생의 행복한 삶을 구현하려는 부처님 뜻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써 으뜸을 삼는다.
계율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니, 계율이야말로 부처님의 세상으로 바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강물이 바다를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가듯, 계율을 지키는 사람의 맑고 바른 삶은 부처님의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간다. <선가귀감> 40장에서는 계율을 지켜야만 부처님의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若不持戒 尙不得疥癩野干之身 況淸淨菩提果可冀
계율을 지키지 못한다면 온 몸에 옴이 번져 털이 빠진 말라비틀어진 들여우도 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어찌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
‘개나(疥癩)’는 피부병의 일종으로서 온 몸에 옴이 번지며 털이 빠지는 병이니 ‘비루병’이라고 한다. ‘야간(野干)’은 짐승이름인데 여기서는 ‘들여우’라고 번역하였다. 몸에 있는 털빛이 청황색이며 밤에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우는 소리가 이리와 같고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청정보리과(淸淨菩提果)는 수행한 결과로써 얻어지는 맑고 깨끗한 깨달음이니 부처님의 세상을 말한다.
수행자가 파계하면 영원히 고통을 받고 살아야 할 무간지옥에 간다고 한다. 이 지옥은 짐승들의 삶인 축생보다도 못한 세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지키지 못할 거라면 계를 받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계율이 갖는 참된 의미는 우리가 맑고 바른 삶을 살게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가도록 하려는데 있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重戒如佛 佛常在焉 須草繫鵝珠 以爲先導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이 하면 부처님은 언제나 곁에 계신다. 초계(草繫)와 아주(鵝珠) 스님처럼 계율을 스승으로 삼을지어다.
어떤 비구가 길에서 도적을 만나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와 갖고 있던 물건들을 다 빼앗겼다. 도적들은 관청에 가서 바로 고발하지 못하도록 풀줄기로 비구를 묶어 놓고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발가벗긴 채로 숲 속에서 풀줄기에 묶여 있던 비구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행여나 풀줄기들이 끊어져 풀들이 상할까봐 염려해 되도록 가만히 있었다. 밤이 되면 찬 바람에 몸이 떨렸고, 한낮에는 뜨거운 햇살에 온몸이 벌겋게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독충이나 벌레에게 물렸어도 움직이면 풀이 끊어져 상할까봐 가만히 이 모든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그때 마침 사냥을 나왔던 임금이 벌거숭이로 약한 풀줄기에 묶여 고통스럽게 꼼짝 않는 이상한 비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비구를 풀어준 뒤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통을 참아내고 있던 비구의 사연을 알게 된 왕은 크게 감명을 받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 비구를 이때부터 ‘풀에 묶인 비구’라고 하여 초계(草繫) 비구라고 불렀다.
또 옛날 어떤 비구가 구슬을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집으로 탁발하러 간 일이 있었다. 집 주인은 임금님의 값비싼 마니주 구슬을 줄에 꿰고 있다가 스님이 오자 공양 올릴 음식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는 스님의 붉은 가사가 투명한 구슬에 비치자 구슬이 적홍색으로 변하였다. 갑자기 거위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그 구슬을 고기살점인줄 알고 먹어버렸다. 주인은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가 구슬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비구를 의심하였다. 다짜고짜 탁발하려고 서 있는 비구한테 없어진 구슬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급해진 주인은 비구를 도둑으로 몰고는 잡아 묶어 마구 때렸다. 훔친 구슬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사는 비구가 그것을 훔칠 까닭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비구를 의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비구가 거위가 삼켜버렸다고 하면 당장에 거위를 잡아 죽일 것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비구는 모진 수모와 곤욕을 달게 받으면서도 거위의 생명을 지켜주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난 주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비구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그때 구슬을 삼켰던 거위가 벌겋게 흘린 피를 먹으려고 기웃거리다가 그만 홧김에 주인이 마구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때서야 비구는 “내가 거위의 생명을 살리고자 이 모진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는데, 이제 거위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구슬이 사라진 이유를 더 숨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음식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간 사이 갑자기 이 거위가 나타나 구슬을 고기살점으로 알고 삼켜 버렸으니, 이제는 죽은 거위 뱃속에서 그 구슬을 찾을 수 있을 겁입니다”라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진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이때부터 이 비구를 거위와 구슬의 이야기를 엮어 아주(鵝珠) 비구라고 불렀다.
초계와 아주 비구 이야기는 <대장엄경론>에 실려 있다. 하찮은 풀줄기와 거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님들이 모진 고통과 곤욕을 달갑게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요즈음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계율에 얽매인 융통성 없는 짓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운 점이 있다. 오히려 가슴 찡하게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성스러운 마음을 그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맑고 바른 마음으로 실천하는 삶의 계율이야말로 모두가 함께하는 행복한 삶의 주춧돌이자 깨달음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된다. 이를 알고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면 바로 눈앞에서 부처님의 세상이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