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믿고 행할 수 있어야
짜면 물 타 먹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 먹어라

일체가 한마음 한뜻으로서 천(天) 지(地) 인(人)이 다 공용(共用), 공체(共體) 하면서 우리는 혼연일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색상(色相)이라는 것은 너 나가 있으니 오래도록 못 만났습니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하지만 우리 색상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 색상이 실체라는 것을 또는 실질적으로 이 색상이 있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인간의 모습은 허무하다고 버리면서까지 이 도리를 알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은 극히 오산일 것입니다. 수많은 스님들과 더불어, 인도로 중국으로 또 중국에서 인도로 법을 구하러 다니면서, 또는 좌선을 하면서 얼마나 모습을 망가뜨리고, 그 모습을 망가뜨림으로써 세세생생에 윤회가 되면서 얼마만큼 돌았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마는 전 너무 실감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뀜으로써 옛날에 명주를 말입니다, 지금은 실크라고 한다면 어찌 그것이 틀리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발전을 한 것입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그것이 명주가 아니라는 말은 못하시겠죠! 우리는 시대가 바뀌는 대로 방편도 바꿔서 개발해 나가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요, 부처님의 법이요, 부처님의 활용이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태초가 있고, 불법이 있고 부처님이 있는 것이지, 만약에 우리가 없다면 태초가 어딨으며 우주가 어딨으며, 실감할 수 있는 실체가 어디 있으며 상대가 어딨으며 세상이 어딨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을 알아야 하며 그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 우주의 본체는 어디 있는가? 바로 천(天) 지(地) 인(人)이 근본이라면 그 천지인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왔다 갔다 하면서 부처님 앞에 가야만이 부처님이 계신 줄 아는 그런 마음은 여간 어리석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부처님이 가르치실 때에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이렇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이 손가락을 쳐들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 하는 것을 지금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생활을 하면서 똑바로 관(觀)해보고,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행하라. 그것이 즉 보살이니라 하고 일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맹종하고 있습니다. 이름에 매달리고 있다 이겁니다. 상대성, 즉 말하자면 그 이름, 물컵의 이름을 듣고서 “컵이여, 목마르니 물 좀 먹게 해주시오.” 하고 아무리 빌어도 내가 목마른데 목을 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인간이 질서 또는 계율, 법칙을 지키는 데 있어서 이름이 아니라면 모두가 서로 상부상조할 수 없으니까 지어놓은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이름을 부르지만 물을 떠먹는 것은 이름이 없습니다. 물을 떠먹는데 “컵아, 나 너한테 물 떠먹는다.” 이러고 부릅니까? 컵을 그냥 들어서 목마르면 물 따라 마시는 것입니다. 지금 컵의 이름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수없이 흘러내려오면서 경을 안 본 사람 없습니다. 불자다 하면 경을 안 본 사람이 없고 세상을 살았다 하면 세상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양이나, 또는 법칙이나 이 세상 살아나가는 도리를 너무도 잘 압니다. 효도도 할 줄 알고, 충성도 할 줄 알고, 나쁜 것도 알고, 좋은 것도 알고, 이렇게 첨단을 넘어갈 수 있는 고등동물의 인간 자체가 만약에 컵의 이름만 가지고 매달린다면 물은 누가 줍니까?
여러분한테 이거 한번 질문할까요? 어느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디다. 그때 나는 그게 뭐 말라빠져 죽은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 손가락으로 컵을 가리키는데 컵만 보지 말고 내가 목마르면 물 떠먹을 수 있게끔 가르치기 위해서 아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얘야, 공양을 들여오면 군말을 하지 마라. 짜면 물 타 먹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 먹어라.” 그게 그냥 보편적인 말 아닙니까? 그런데 뜻이 말입니다, 그 후에 뜻을 보니 이것은 우주 이 세상 모두가 사생(四生)이 돌아가면서 살아나가는 법칙의 긍정적인 말입디다, 긍정적인 법입니다. 만약에 “얘, 짜다. 물 가져오너라.” 이랬다면 벌써 삼백 년이 흐르고 말아요. 이거 한마디라면 우리 생활하는 데에 얼마만큼 지침이 될지 모릅니다. 또 이게 “싱겁다, 간장 가져오너라.” 이런다면 벌써 이거는 삼천 년이 흐르고 만다 이 소립니다. 들어와도 삼십 방망이 나가도 삼십 방망이 한 소리가 바로 그 말의 뜻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간은 누가 타 먹느냐? 누가 간을 맞춰서 먹을까요? 짠 것도 아니고 싱거운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다 놔라 이랬습니다. 짠 것도 놓고 싱거운 것도 놔라. 놓으란다고 불교가 그냥 맹종하고 부처님 앞에 그저 타신을 믿으면서, 나 아닌 대상을 놓고 믿으면서 극진히 정성을 들인다 한다면 그건 자기를, 자신을 모르면서 맹종하는 것입니다. 그건 노예입니다. 이 세상의 노예입니다. 자기 자신이 간을 타서 맞게 먹을 수 있어야 그것이 참사람이요, 그것이 바로 스스로서 계율이 따로 없고 스스로서 질서도 없고 스스로서 법칙도 없다 하는 거죠. 그렇게 없기 때문에 철두철명한 것입니다. 철두철명하기 때문에 진리는 고정됨이 없다 이겁니다.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이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땅을 디뎠으니
바리때 하나면 족한 것을….
허허! 무엇을 더 바라랴.

허허! 하고 하늘 쳐다보니 청정하고
내려다보니 땅은 잔잔하더라.
산천초목은 우거져서 무성하나
물은, 바닷물은 잔잔하게 흐르더라.

그러나 쳐다보고 울고 내려다보고 웃는
그런 맛은 어디로 가고
사생(四生)의 눈물은 바다를 메우고
바다를 메우는
그 한 방울의 눈물은 어디 있는고?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만 생명이 있고 사는 법칙이 있는 줄 아시는 분은 없겠죠. 사생(四生)이라는 그 자체가 천차만별로 돼 있지마는 좀더 시야를 넓혀서, 사람만 죽이지 않아야 살생이 아니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만 쫓기고 쫓는 게 아니라 사생이 모두 쫓고 쫓기면서 그렇게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나만이 생명이 있고, 나만이 살고, 나만이 친척이 있고, 나만이 형제가 있고 자식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이 내면세계의 그 마음을 찾아서…, 찾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있기 때문에 발견하라는 거죠.
이름해서 만약에 우리가 삼세심(三世心)이라 하면 일심(一心)이요, 일심이 드는 데는 이름으로써의 방편을 말하자면 ‘삼중천(三重天)’에 이른다. 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과거에 살던 그 이치가 꼬리를 물고 현실에 물려 있고, 현실에 사는 꼬리가 바로 미래에 얽혀 있으니 어찌 삼중천이라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삼세심이 일심인 줄 알면 그 일심이 어디에 있는고?’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까 간장 얘기 한 거와 똑같이 만약에 이것이 틀린가 옳은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삼중천을 뛰어넘을 수 없어서, 하나가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를 겁니다, 아마. 하나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삼중천이라 이름한다면, 방편으로서 사왕천(四王天)이다 합니다. 사왕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삼중천에 연결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왕천이 바로 일심으로서의 원심력을 얻는다면 이 사방을 다 지배하고 들이고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조들이 우스갯소리로 “너, 개구리탕만 할 줄 알았지, 용탕은 할 줄 모르는구나.” 이런 말들을 했죠.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아까 실크 얘기도 했지만 불법을 믿는 사람들은, 불교국이다 이런다면 항상 그게 자비라나요, 칼을 가지고 들어와도 가만히 있는 것이 자비라나요. 그게 아닙니다. 또 칼을 가지고 들어왔으니까 나도 칼을 가지고 대결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닙니다. 아까 얘기했죠? “삿갓 쓰고 주장자 짚고 땅을 디뎠고 바리때 하나면 족한 것을….” 했죠. 그걸 뜻으로 보십시오. 만약에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면 손가락을 보지 마시고, 그 뜻을 말한다면 머리로 하늘을 받치고, 주장자는 기둥이 되고, 땅을 디딘 평발은 주춧돌이 돼서 바리때를 들이고 낼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법륜(法輪)을, 사무사유(四無四有)의 법륜을 그냥 굴리면서, 체계 없으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체계가 있고 스스로서 법칙이 있고 한 것을, 그대로 자유스럽게 여러분이 중용을 할 수 있다, 그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얘깁니다.
진정한 자비가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여러분 중에는 불법이란 무조건 자비하기 때문에 내가 그냥 아무렇게나 말을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지금 세상의 법칙에 의해서도,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끼리끼리 자기가 죄 지은 대로 감옥에 넣었습니다.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끼리끼리 돌아갑니다. 상점에 놓여 있는 것도 끼리끼리 놓여 있듯이,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천차만별로 차원에 따라서 알맞게 자기 환경에 따라서 집어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활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모두가 부처님이 가르친 것을 질서정연하게 스스로의 법칙을 그대로 활용하라는 거지, 너는 그대로 고립돼서 무(無) 공(空)에 빠지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름 붙여서 사왕천(四王天)이라 한다면 무명천(無明天)도 있고, 무명천이 있다 하면은 생사천(生死天)이 있다. 그 생사천은 누가 다루나? 만법천(萬法天)이 다룬다. 만법천은 누가 다루나? 여래천(如來天)이나 도솔천(兜率天)이나 도리천에서 다룬다, 모두를. 우리가 옥황상제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있을까? 대법원장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이 공부하시는 데에 따라서 너무나 철두철명합니다. 스스로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여도 자비요, 살려도 자비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생(四生)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만법천에서 생사천으로 지배를 하고 있는 사실은 뭐냐? 여러분 과거에 살던 그 자체가 지금 현실에 살고 계십니다. 과거에 살 때에 사신 대로, 차원대로, 그릇대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릇대로 출현하신 거라면 바로 우리가 옷을 벗을 때도 생사천에서 벗게 하고 또 내보낼 때도 생사천에서 내보낸다 이겁니다. 자기 차원대로 말입니다. 금이면 금대로 만나게 하고 은이면 은대로 만나게 하고, 까마귀면 까마귀대로 만나게 하고 말입니다. 또 오무간지옥에 갇힐 거라면 아주 무명천에다 가두고 말입니다.
무명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너무나 마음에 복수심이나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 가둬두는, 영혼을 가둬두는 감옥입니다.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잘 보세요. 감옥이 있죠? 만약에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감옥이 왜 생겼겠습니까! 천차만별로 그렇게 일을 저지르기 때문에 감옥이 생긴 거죠. 현실에 있기 때문에 바로 무(無)의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지배하는 것은, 만법천에서 내보내면 생사천에서 가려서 내보낼 때에 오무간지옥으로도 보내고, 칼산지옥으로도 보내고, 무명천으로도 보내고, 또 화탕지옥으로도 보내고 여러 군데로 분리해서 다 보내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옥이 따로 없으니 현실에서 잘 관조하라고 했습니다. 천차만별로 사생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길을 가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더랍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그러고 들어보니까, “스님, 스님! 제가 까마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가 지금 오백 년이 됐습니다.” 한 번 까마귀로 모습을 받으니 거기에서 벗어날 길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스님이 제 모습을 한 점이라도 잡숴주신다면 저는….” 이 까마귀 모습을 벗겨주십시오, 이거거든요. “너는 까만 짓을 잘해서 어떻게 희게 만들 수 있겠느냐?” 하니까 “비록 거죽은 까마나 속살은 하얗습니다.” 이러거든.
여러분도 참 거죽으로는 못생기고 못났고 보잘 것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속마음이 아름답고 착하고 슬기롭고 지혜롭고, 내면적으로 언제나 자기를, 자신을 믿고 만법을 행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분이라면 아마 거죽은 비록 그럴지언정 속은 하얄 겁니다. 백옥 같을 겁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즉시에 까마귀 모습을 벗겨줬더랍니다. 여러분은 이런 얘길 하면 옛날 얘기처럼 들으시는데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옛날이나 미래나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돼서 돌아갈 것입니다.
내가 항상 공(空)했다, 공했다! 그러는데, 이 세상에 난 게 주인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자성신이…, 그 행동 하나하나 하고 마음 찰나찰나 바꿔지면서 돌아가는 것이 공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질서를 가르쳐서 질서를 지킵니까? 사생 그 자체, 까마귀 얘기 한 것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려운 인연을 만나서 서로 고생을 하고 이러는 것도 당연하지마는 고(苦)를 누가 가져다 준 게 아닙니다. 알로 낳는 거, 태로 낳는 거, 화(化)해서 낳는 거, 질척한 데서 낳는 그 사생이 어떻게 해서 사생으로 빠지나? 인간이 까마귀가 될 수 있고, 부모가 죽어서 까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죠. 사람이 어느 날 한 마디를 잘못 해서 백 마디를 잘못하게 되고, 만 마디, 천 마디를 잘못하게 돼서 독사지옥에 떨어졌더니, 독사의 모습을 가지고 나오니 아무리 내가 사람이라고 부르짖어 봐도 누가 독사라고 그러지 사람이라고 대해주지 않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귀먹고 눈뜨지 못한 사람들은 까치 소굴에 들어가서 까치 새끼로 태어날 수도 있으니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을 잘못하면 새 종류로 아마 태어나겠죠.
마음을 독하게 써서 독사지옥으로 떨어지고 이러는 것이 독사지옥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나서 그렇게 고를 당하고 그렇게 쫓기면서 쫓으면서 땅꾼한테 붙들려 다닙니다. 이거 한 가지 말을 했다고 그래서 고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어났더니 아, 몇 달 만에 다 큰단 말입니다. 사람은 어른이 되려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이렇게 가지만 아, 그거는 단번에 어른이 되거든요. 금방 크면 금방 모가지 졸려서 죽고, 걸렸다 하면 죽고 몇 번이나 죽음을 당합니까? 죽고 또 죽고, 죽고 또 죽고, 죽고 또 죽고. 그러니 얼마나 그것은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닭 사다 잡수시죠? 여러분이 닭이나 생선이나 꿩이나 무슨 돼지를 보세요. 돼지만 하더라도 돼지의 모습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일 년 이태 삼 년만 산다 해도 몇 번 죽음을 당할까요. 커서도 당하고, 작아서도 당하고, 근수만 나간다면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그대로 있느냐? 돼지에서 또, 또 출현을 하게 되죠. 그거 벗어날 수 없죠. 아주 힘들어요. 왜냐하면 자꾸 그 습을 익히기 때문에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그 모든 양면을 다 놔라 하는 겁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데는 시공을 초월했기 때문에 부처도 뛰어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채식을 해야만 공부를 한다 이러거든요. 물론 공부할 때는 채식 아니라 채식도 없죠. 먹으려고만 생각한다면, 죽지 않고 먹으려고만 생각한다면 공부를 못 하니까, 물론 육식보다도 아무거나 먹고 그냥 공부하게 되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사생의 어떠한 것들은, 돼지나 소들은 사람들도 되니까요. 짐승이다, 사람이다 할 수도 없어요. 어떻게 빨리빨리 돌아가는지, 한 찰나 찰나 돌아가거든요. 사람이라도 사람으로만 있는 게 아니고 돼지도 돼지로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 사생(四生) 가운데 한 점의 고기를, 이런 공부하는 사람한테 한 점을 공양하기가 천년 만에 한 번 하기가 어렵다 이겁니다. 그 뜻을, 그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예전에 경허 스님이 돼지 다리를 뜯고선 술을 한 병들이를 자셨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걸 흉을 볼 텐데, 그분은 돼지 한 마리 하면 돼지 속의 돼지의 생명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건 인연에 따라서 만남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게 두서없는 얘기 같지마는 진리는 순서 없는 게 진리니까요. 허허허. 아니, 글쎄 돼지 속에도 생명들이 인연에 따라서 드는 겁니다. 이거 잘 들어보셔야 돼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88년 9월 18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6-09-18 오전 11:08:10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