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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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부 60강 혜능과 지눌의 맞장구/한국학중앙연구원
배고프고 성질내니…너는 부처다

혜능의 구결 가운데, 얽힌 힘줄 몇 군데를 짚어보자. <금강경>의 무소득(無所得)을 두고서 그는 이렇게 부연했던 것을 기억한다.
[혜능] “그가 깨달은 것은 단 하나, 자성이 본래 청정하며 본래 번뇌 장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적이상조(寂而常照)가 곧 자성불(自成佛)이라는 이치 하나이다.” 但悟自性本來淸淨, 本無塵勞, 寂而常照, 卽自成佛.

(1)“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 불교 특히, 선문(禪門)에서 늘 듣는 말이 “자성(自性)은 청정(淸淨)하다”는 것일게다. 여기 자성은 대체 무엇일까. 오랜 무문 토굴과 화두 일념을 통해서야 여기 다가갈 수 있을까. 또 초기불교는 “자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왜 여기서는 자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그게 절대 청정하다고까지 말하는가.
앞질러 말하면,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른 자성(自性)을 말하고 있지만, 두 주장은 상호 보완적이다.
초기불교의 무아 논의는 여기 생략하기로 한다. 한 마디만 짚자면, 여기 “없다는 자성(自性)”은 세계를 향한 자기의식의 중심을 가리킨다.
지금 혜능이 말하는 자성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아참, 여기 자성(自性)은 불성(佛性)과 같은 말이라는 것은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오늘 해설은 내 무딘 사설보다 고려 지눌 스님의 깊은 속내를 듣기로 한다. 출전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수심결(修心訣)>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책 제목 그대로, “마음 닦는 핵심 비결”과 연관되어 있으니, 잘 새겨들어야 한다.

(2)그렇다면 너는 곧 부처이다.
지눌은 자성이 대체 무엇이고 그게 어디 있느냐는 학인들의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지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당연히 너는 곧 부처이다!”

그럼, 이 자성을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지눌은 다시 친절을 베푼다.
- “네 마음이 이미 그렇다니까, 못 알아듣고선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고 묻느냐. 무슨 수를 쓰자고 들면 지식이 개입되고, 그럼 일은 어그러져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 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닐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찾을 생각도 말고, 안 보이네 어쩌네 하는 생각도 하지 말게. 내 마음의 신령스런 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라,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견성(見性)한 것이야.”
(3)적이상조(寂而常照), 비어있는 곳의 신령한 지식(空寂靈知)
학인 하나가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지눌의 고구정녕이 이어진다.
- “도(道)는 알고 모르고에 달려 있지 않다. 너는 제발, ‘나는 지금 모른다.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부터 접고, 내 말을 새겨들어라. 네게 보이는 사물은 다들 이미지에 불과하고 너의 수많은 생각 또한 본시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렇게 안팎이 비어있는(空寂) 곳에, 신령스런 지식(靈知)의 작용이 환하게 밝다! 알거라, 이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아울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역대 조사(祖師)와 천하 선지식들이 그룹 안에서(密密) 전해온 진리의 인증(印)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다리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지위(佛地)에 오른다. ‘걸음걸음이 삼계(三界)를 건너 있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의심이 끊어졌네.’ 그때 너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갖추어, 지상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지니, 하루 만냥의 황금을 흩어 쓸 것이다. 네가 이리 된다면 진정 대장부이니 일생 해야 할 일을 마쳤다!”
혜능이 ‘적이상조’라고 하는 것을 지눌은 ‘공적영지’라고 했다. 적(寂)은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 곳, 즉 번뇌와 염려 등의 진로(塵勞)가 탈각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 오랜 장애로부터 벗어나는 만큼, 우리 마음은 본래의 신령스런 작용을 회복한다. 그 영지(靈知)를 혜능은 ‘비춤(照)’이라고 불렀다. 흡사 구름 없는 태양이 세상을 구석구석 비치듯, 편향과 외곡, 자기 중심이 없는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비출 수 있다. 그때 즉 ‘자성불(自成佛),’ 저절로 부처를 완성한다.
어제 운전을 하다가 버스에 꽁무니를 치일 뻔했다. 무심코 지나가다 흘낏 보니 조금 싼 주유소였던 것이 기억났고, 핸들을 꺾을 때, 나는 주변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마음이 문득 편의와 이익에 점유되고 나면, 사물을 공정하게 전체적으로, 여유 있게 보기를 놓치고 만다. 사방이 갑자기 캄캄 어둠에 싸이고 욕망으로 난 한줄기만 길이 열리는 것을, 경계, 또 경계해야 한다. 나는 버스의 승객들에게 정중히 거듭 사과했다. 나 자신에게도….

(4)저 물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그럼, 이 ‘비어 있되 신령스런 마음(空寂靈知之心)’을 어떻게 캐치할 것인가. 누구에게나 있다는데... 지눌은 대답에 지쳐, 한심한 얼굴로 타박한다.
- “그놈, 아직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한테 묻는구나. 네 본심을 바로 가리켜 줄 테이니, 깨끗한 마음으로 잘 들어라. 다시 말하마. 하루 내내 보고 듣고, 웃고 떠들며, 화도 내고, 좋아라고도 하며,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가르고, 이런 저런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는데, 물어보자. 이게 대체 누가 하는 일이냐. 몸이 한다고? 시체는 냄새도 못 맡고 눈도 꿈뻑거리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몸이 그것을 한다고는 못하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필시 너의 본심(本心)이다! 그 밝은 신령이 있어 감이수통(感而遂通), 사물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그래서 방거사가 왈, ‘신통하구나, 묘한 작용이여, 내가 물을 긷고 섶을 져 나르다니...’라고 했던 것이다. 그럼, 이 자리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여러 문이 있지만 하나만 가르쳐 주마. ‘저기 나무 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예!’, ‘그 듣는 것의 바탕으로 들어서면, 거기 수많은 소리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수많은 소리들,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기특하구나. 여기가 소리를 통해 진리로 들어서는 곳(觀音入理之門)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물어보자. 거기 일체의 소리들도, 일체의 분별도 없다고 했겠다, 그럼 그건 맹탕 아무것도(虛空) 없다는 것이겠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환하게 밝고, 어둡지 않습니다.’ ‘그 맹탕 아니고 환한 무엇은 어떤 몸을 하고 있는고?’ ‘형태가 없어, 말로는 그릴 수 없습니다.’ ‘옳지, 거기가 여러 부처와 조사들의 목숨이 달린 곳이다. 다시 의심하지 마라.’”
지눌은 덧붙인다.
- “그것은 크기도 따질 수 없고, 끝도 없으며, 안팎이나, 오고감, 나고 죽음도 말할 수 없다. 깨끗하고 더럽다도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고, 그러므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도 우스운 말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도 없고, 형태도 이름도 없기에, 그래서 ‘본래 공적(本來空寂)’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무정(無情)한 벽돌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거기 신비로운 이해와 작용(性自神解)이 있기 때문이다.”
2006-09-18 오전 1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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