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철지난 휴가를 독려하는 여행사들의 광고문이 눈길을 끈다.
“남들이 쉴 때 일했고, (그래서 지금) 남들이 일할 때 쉰다.”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중도법문이 따로 없음을 보여준다. 요즘 선사의 게송은 주로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 손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에 질세라 어느 자동차회사의 광고문도 그 못지 않는 내공을 보여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쳐다본다는 것은 …. (처음에는) 기분이 나쁩니다. (하지만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한때 어느 대중가수가 불렀던 “… 아하!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그 겨울의 찻집’)고 하는 가사만큼이나 잔잔한 감동을 준다. 중도법문은 이미 생활법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60~70년대 자주국방과 경제자립을 외치던 시절에 자주 들었던 “싸우면서 건설한다”라거나 “뛰면서 생각한다”는 고전적 중도법문들은 시대가 바뀌어 감에 점차로 세련된 표현으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앞으로는 또 무슨 기발한 소리가 나오려나 광고문를 열심히 살펴야겠다.
선가의 대표적 중도법문이기도 한 ‘절름발이 자라요, 눈 먼 거북이로다’라는 말과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에는 비가 오도다’ 라는 말도 선어록 곳곳에 자주 등장한다. 염관제안선사는 ‘허공으로 북을 삼고 수미산으로 망치를 삼는다’고 하였고, 파릉 선사는 ‘닭은 추우면 나무위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내려온다’고 한 것이나 설봉 선사의 ‘밥 광주리 앞에서 굶어죽고 물가에서 목말라 죽는다’ 는 것도 모두 이 형식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선문염송 14칙 ‘오통(五通)’에는 부처님과 외도선인이 등장하여 신통력에 대해 논한다. 부처님에게 다섯가지 신통력을 갖춘 선인이 물었다.
“부처님은 여섯가지 신통력이 있으신데 나는 다섯가지 신통력 밖에 없으니 어떤 것이 나머지 한 신통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했다.
“선인아! 나에게 그 한 신통을 물었느냐?”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서 운개 본(雲盖 本)선사는 이렇게 착어(着語)했다.
“미인은 벌써 하늘로 날아갔거늘
어리석은 서방님은 여전히 아궁이 앞에서 기다리는구나.”
그 시의 배경은 이랬다.
옛날 고대중국에 사단(謝丹)이란 노총각이 살았다.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큰 조개를 주었다. 이를 들고서 집에 갔는데 그 조개에서 미인이 나왔다. 이후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말했다.
“서방님! 아궁이에 불을 좀 넣어주세요. 나는 물을 길어오리다.”
그러고는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런데도 그 총각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그 여자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부처님의 물음에 제대로 된 말씀인지 아닌지는 내 안목으로는 구별할 길이 없지만 이 답변 역시 중도법문의 형식에 참으로 충실함을 알 수 있다.
송나라의 만암치유(萬庵致柔) 선사의 게송도 마찬가지이다.
산호베개 위를 흐르는 두줄기의 눈물이여!
한줄기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이요
또 한줄기는 그대를 원망하는 것이라.
두 줄기의 눈물을 통하여 애증(愛憎)을 동시에 표현하는 유명한 중도시(中道詩)라고 하겠다. 하긴 보통사람들도 헤어질 때는 누구나 ‘시원섭섭하다’ 라고 중도적으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