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정성으로 하나하나 맡겨 놓아야
물질을 축적하는 마음 자세
문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겹게 벌더라도 아름답게 쓰라고 옛 조상님들께서 말씀하셨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내 멋대로 편하게 쓰자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물질을 축적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옛날에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지방의 원님으로 갔는데 원이 너무 욕심이 많았습니다. 욕심이 많아 가지고선 그저 돈을 갖다가 항아리에다가 들이 모으고, 또 지금으로 치면 취직을 시켜 주고 돈을 받고 장리를 줘 가지고 이익금 남는 걸 또 받고 넣어서는, 하여튼 큰 항아리에다가 잔뜩 넣어 놓고선 고만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그만 그냥 객사를 했지요.
그랬는데 그때서부터 그 마을이 도대체 밤이면 집집마다 그냥 셋이 되기도 하고 아홉이 되기도 하고 열이 되기도 하고 이러면서 소복 입은 하얀 여자도 됐다가 신장도 됐다가 또 꺼멓게 옷을 입었다가, 이러면서 집집마다 그렇게 돌아다니고 그러니까 그 동네에서 살지를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죽는 사람도 더 많았고, 또 그 동네 일판이 다 이사를 가게 됐죠. 그래 그 흉가 때문에 그렇게 나라의 원이 살던 그 고을이 그만 쑥대밭이 돼 버리고 말았죠. 그랬는데 그 나라의 고을에 자꾸 원님을 내려 보내려 해도 그런 일이 있어서 자꾸 죽어 나가니까 할 수 없이 부임을 시키질 못하고 있는 처지였죠.
그래서 풀이 산더미처럼 나고 그랬는데, 어느 때에 어느 도승이 지나다 보니까 그 마을이 쑥대밭이 됐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그 마을에 부임하는 팔대조 할아버지가 원님으로 부임을 해서 참 아주 정직하고 그랬으나 두 나전들이, 얼른 쉽게 말해서 나전들은 심부름을 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돈을 받아먹고 자꾸 일을 거슬려 놨으니깐 그 할아버지도 모함을 받아서 고만 귀향을 가서 죽었거든요. 그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그 인연으로 자기가 거기에 당도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이치로 그 마을을 다스리지 못해서, 안팎을 다 다스리지 못한 죄상으로 자기가 팔대조의 할아버지 인연으로 여기를 왔다는 생각이 무뜩 들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인해서 거기를 왔으니까 ‘여기에서 이걸 해결을 해 줘야겠구나.’ 하고 그 중 옷을 다시 잠깐이라도 벗고선 부임을 하게끔 했습니다. 거기는 누가 간다고 하기만 하면 부임을 시키니까요, 나라에서.
그래서 간다고 해서 그 고을의 원으로 들어섰습니다. 들어섰는데 밤이면 온통 그냥 천장에서 내려오고 또 문도 열리면서 그냥 들어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그분은 벌써 아시고선 큰 화로에다가 불을 한 화로를 해 놨답니다. 그런데 옛날 집은 벽장이 큰 게 이렇게 붙어 있는데 그 벽장문이 스르륵 열리더니만 거기에서 큰 누런 손이 나오고 검은 손이 나오고 이러거든요. 그래서 나올 적마다 거기에다가 인두를 꽂아 놓고서는 한바탕씩 이렇게 질렀답니다. 그렇게 해 놓고 가만히 근맥을 봤답니다. 근맥을 보니까 ‘아하!’ 그때 알았습니다.
왜 알았냐 하면, 이게 요기에서 들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돈을 모을 때 악으로써 모은 것은 악의 장난을 하고, 씀씀이를 잘 쓰려고 선으로써 모은 돈은 선으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장난이 없이. 그런데 그 마음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그 돈마저도 사(邪)가 돼 가지고선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그 스님께서 그것을 아시고선 이튿날 일찍 일어나서 모든 군졸들을 풀어서 거기를 파게끔 해서 그 돈을 다 파서 그 고을에 이사 나갔던 사람이 다시 들어오게 만들어 놓고, 원님을 다시 내고, 군졸들을 풀어서 풀 뽑게 하고 다 잘 고치고 짓고, 그 돈으로다가 없는 사람들 다시 집 지어 주고 그래서 고을을 다시 신축을 해 놓고선 가서 원을 벗었죠, 인제. 원님이라는 걸 벗고선 다시 그 승려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이렇게 해서 참 좋게 살게 하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모은다 하는 것도 말입니다, 재산이 있다 하는 것도 우리가 주인공에서 관리만 하면 될 걸, 주인공이 하는 거니까 내 주인 거지 나는 관리인이거든요. 그런데 관리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된다면, 이리 찢고 저리 찢고…, 그게 사(邪)가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도 여러분이 땅을 사고 집이 있고 돈이 있고 그렇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사가 돼서, 그 돈이 ‘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사가 돼서 모든 게, 내가 행하는 게 모두 사로 돌아가요. 그러니 되는 노릇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으로 지어서 마음으로 해결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끄달리고 또는 사무치고 아프고 그렇게 만드니까 여간 사람 살기가 고통이 되는 게 아니죠.
그래서 우리는 기복을 떠나서 우리 자성을 깨치면서 ‘나도 공했는데 뭐가 있으랴. 나는 관리인일 뿐이다.’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종합해서 ‘아! 주인공이시여!’ 하면 그건 전체에 들리는 건데, 따로 나를 이렇게 찾을 게 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처음에 나를 찾을 때는 꼭 ‘내 주인공!’ 하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일체 신이 거기 주인공에 다 들어 있다는 걸 그대로 믿고 찾아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믿고 찾고, 관하고, 감사하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렇게 자기 은혜를 모르고 자기는 그렇게 산발하게 다니니까 모든 게 사(邪)죠. 사가 돼서 모든 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돈이 사가 되는 것도 그런 마음의 까닭이요, 돈이 쓸모 있게 쓰여지는 것도 마음 탓이요, 내 몸이 근중하게 되는 것도 마음 탓이요, 내 몸이 걸레가 되는 것도 마음 탓이란 얘깁니다. 모든 게 다 그렇죠.
그러니 모든 일체 만법의 만물이 다 마음에서 이렇게 갈라지고 저렇게 갈라지고 그러는 거지, 악도 그 한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한마음에서 나오는 걸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을 끄달릴 테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거기서 나오는 한마음도 ‘자신(自神)’이 돼서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나와서 행을 할 수 있죠. 그 ‘자신(自神)’은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졌답니다. 또 그 반면에 ‘자악신’은 무궁무진하게 악을 범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거냐 저거냐 그럴 때, 이것도 여기서 나오는 거 저것도 여기서 나오는 거니까 두 개를 다 놔야 되죠. 그래서 그 한 구멍으로, 한 구멍에서 두 개가 나왔던 것을, 두 개를 한 구멍에다 다 집어넣으면 바로 올바른 이치가 되죠. 그래서 신수는 ‘색즉색’이 됐고, 또 육조는 ‘공즉공’이 됐거든요. 그러니 어떤 것이 맞느냐는 얘깁니다. ‘공즉공’ 이렇게 한 사람이 옳으냐, ‘색즉색’ 이렇게 한 것이 옳으냐 할 때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다 놨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윤회하는 인연에서 벗어나려면
문
할아버지가 죽어서 그 집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게 되는데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한번 가족으로 엮어진 인연의 고리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요?
답
이런 얘기 해 드리기도 하지만 전설의 고향에서도 가끔 보시리라고 믿습니다. 금방 부모가 됐다가 금방 그 부모가 죽어서 그 대에 또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손자가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남의 집의 아들도 될 수 있고 남의 집 손자도 될 수 있는 겁니다. 때에 따라서는 소가 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수억겁을 거쳐서 미생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인간이 되기까지도 이렇게 쫓기고 쫓으면서 어렵게 왔는데, 피땀을 흘리면서 이날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렵니까? 내가 잘났든 못났든 내 몸을 가지고 나왔을 때 이 도리를 알고 자유롭게 몸을 벗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 하나로 인해서 위로 부모 조상들이나 아래로 내 자녀들을 다 이끌어 줄 수 있는 바탕이 튼튼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누구든지, 손자가 태어나도 그렇고 손녀가 태어나도 그렇고 다, 그 대에 사람 노릇을 못하고 기둥을 붙잡고 모로 서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이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만 하라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식도 손자도 윗조상도 전부 남입니다. 그 남을 위해서, 아니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지만요.
항상 하는 얘기했지만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예전에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죽으면 산에다가 그냥 내다 놨기 때문에 뼈다귀 무더기가 많았답니다. 석존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모퉁이를 도시다가 그 뼈 무더기에 절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이 “사생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어찌 그런 하찮은 뼈다귀에다가 절을 하십니까?”라고 했겠죠. “이 뼈다귀가 전자의 우리 할머니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니까, 그 제자들이 “미처 이런 뜻을 몰랐습니다.” 하고 그냥 고개를 땅에다 대고 흐느껴 가면서 울었답니다. 전자에 있었던 옛날 얘기로 듣지 마세요. 지금 현재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은 그 한 찰나 한 찰나를 모를 겁니다.
예를 들어서, 두꺼비가 뱀이 되고 뱀이 두꺼비가 되고 이렇게 되는 그런 이치도 있습니다. 뱀이 두꺼비가 됐을 때는 자기가 전자에 뱀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또 뱀이 자기가 앞으로 두꺼비가 될 줄 모르거든요. 자기가 하는 대로거든요. 그러니까 두꺼비는 욕심이 많아서 때에 따라서는 구렁이한테 가서 일부러 먹히려고 그러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새끼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요. 그러한 그 욕심 탐착! 많이 낳으면 뭘 합니까, 글쎄. 하나가 인연이 돼서 붙들리면 그렇게 고가 많아요. 고가 더 많죠. 그렇듯이 굼벵이가 매미가 되고 매미가 굼벵이가 되고 이랬을 때도 그렇고 모두가…, 소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소가 되고 이런 것도 우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죠? 그런데도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다 이겁니다. 그런 윤회에 항상 끄달리고 얽매이느냐, 귀신으로 사느냐, 저런 짐승으로, 개로 사느냐.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사느냐, 아니면 참 멋진 사람이 되느냐 이런 것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죠.
병원이 더 무서워요!
문
며칠 전에 텔레비전을 봤는데, 병원에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MRSA라는 세균이 약물에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 독한 항균제를 써야만 겨우 사멸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병은 병원에서 쓰는 물건이나 의사의 손을 통해서 전염이 되는데 잘못되면 폐혈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스님 법문에도 의사나 병원에 의지하지 말고 내 안의 힘을 길러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제는 병원이 더 무서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이 마음의 도리를 알고 내 마음의 힘을 길러서 어떠한 세균이 침범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어야만 나와 내 가정을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다시 한 번 세균성의 문제에 대해서 일러 주시면 내 몸을 내가 지키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답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도 한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세상이라면 좀 더 우리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원 불생불멸 할 수 있는 그런 각오를 하시고 불심을 좀 더 돈독하게 가지시고 진실하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진실한 믿음을 가질 때, 부처님 앞에 와서 진심으로써 삼 배를 올릴 때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몸이 내 몸이요 바로 부처님의 그 무한의 능력이 내 능력이기도 할 터인즉, 내가 아프다면 바로 내 지극한 마음속에서 바로 의사가 나올 것이고, 바로 지극한 마음에서 가난을 물리칠 것이고, 지극한 마음속에서 유생 무생(有生無生)이 다 한마음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병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의 그 능력의 빛이 바로 세균의, 보이지 않는 세균의 모든 것을 뿌리칠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빛에 의해서 녹아 버릴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생기고, 또 녹아 버리는가 하면 피해서 그것이 다시 몸이 화(化)해서 다른 걸로 창조가 되기도 하니 죽이는 게 죽이는 게 아니고 살리는 게 살리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떠한 미물의 짐승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억겁 전년서부터 우리는 이 몸뚱이를 사람의 몸뚱이로만 가져온 게 아닙니다. 뱀의 몸뚱이나 거북의 몸뚱이나 소의 몸뚱이, 어떤 벌레의 몸뚱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 몸뚱이 저 몸뚱이로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또 인간으로서 성립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가 내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한데 합쳐서 수천 년 전,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거쳐 온 거를 생각할 때에 나 아님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모두가 나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야! 이렇게 큰 덩어리의 사람이 저까짓 것 미생물 하나….’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 미생물로 인해서, 그 세균으로 인해서 우글우글하는 거를 마음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 주고받고 하기 때문에 내 몸이 이렇게 지금 탈을 쓰고 갑니다. 인간 탈이라고 그러죠, 이걸. 이건 탈바가지입니다, 어디까지나! 조그만 탈바가지고 큰 탈바가지죠.
그래서 옛날부터 난 이런 말도 잘했습니다. “자신을 아십시오. 자신을 아신다면 전체의 근원이 그 자신의 근원이 될 겁니다. 천지의 근원도 바로 마음의 근원이 될 것이고, 이 우주의 근원도 바로 마음의 근원이 될 것이니 그 어찌 보람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요. 그럼으로써 내 몸을 내가 끌고 다니는데도 유유히 끌고 다닐 거라고요.
물론 죽을 것도 영 죽지 않게 살릴 수 있겠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 됩니다. 탈을 썼다가 버릴 때가 오면 버리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고통을 받아 가면서 자기가 할 일을 다 못하고, 그냥 애를 쓰면서 고통을 받는 거는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깁니다.
세상에 한생각으로서 보이지 않는 그 세균이 벌집처럼 일어날 수도 있고 그 세균이 벌집처럼 일어나는 걸 내 한마음에 집어넣어서 녹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한마음에서 벌집처럼 일어나게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다섯 가지의 오신통이라고 할까요? 그걸 수레바퀴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을 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근본을 아는,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거기에서 그 수레바퀴는 어디에든 쓸모가 있는 보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의학적으로도 말입니다, 병균을 집어내기는 했는데 이 병균이 어디서 온 걸 모릅니다. 그러면 요거 한 가질 연구해 냈다 해서 다가 아닙니다. 한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약을 만든다 하면 다른 생명이 죽습니다. 그런다면 이 연구는 하나마나죠. 그렇기 때문에 연구 하나 하는데 인체의 다른 생명들에게, 세포에나 모든 것에 지장이 없이 하나만 죽이는 연구에 생을 다 바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습니까? 이거는 더하고 덜함이 없으면서도 내 주인공의 한마음의 베어링은 스스로 굴러가면서 그냥 여지없이, 무슨 부작용이 없이 말입니다. 파워를 일으키려 해도 일으킬 수 있고, 일으켜서 그쪽 부분을 좋게 하려면 좋게 하고 이쪽 부분을 좋게 하려면 좋게 하고, 나쁘게 할 수도 있고 좋게 할 수도 있는 이런 원력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는 그 사실!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부처님 법이라기 이전에 우리들의 법이 이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들을 비유해서 보겠어요. 왜 세균이 나쁜 역할도 하고 좋은 역할도 하느냐는 얘깁니다. 그것이 이해가 안 간다면 우리 인체 안에서도, 내 몸 안에서도 생명체들이, 지금 세균들이 있다고 봅시다. 이름을 세균이라 하지만 바로 나인 것입니다. 나의 분신인 생명이 여기에 있는데 만약에 타의에서 유전자가 들어왔다면 세균입니다. 자의에 있는 생명은 세균이 아닙니다. 나를 나쁘게, 인체를 해롭게 하는 것이 세균이지 인체를 이익하게 하는 것은 바로 ‘나’인 것입니다.
만약에 내 생각이 잘못 돌아가면, 이 혹성의 사장이, 여러분이 다 혹성의 사장입니다. 사장이 잘못 생각을 한다면 이 인체의 유전자, 즉 말하자면 인체에 있는 생명들의 유전자들이 다 겉으로 노는 거예요. 그 사장이 잘못 생각하는 대로 파워를 일으키고 분단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는, 그러니까 타의에서 세균이 침입을 해서 들어올 때 막아내지 못한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몸뚱이는 여기저기 병이 들고, 파워를 일으키니까. 이렇게 해서 집이 망가지는 거죠. 여러분의 중심이 없다면 빈집이니깐 들어와서 모든 세포의 눈을 통하고 귀를 통하고 몸을 통해서 갖은 병, 갖은 악취스런 냄새가, 거미줄도 치고 벌레도 생기고 그래서 여러분의 몸은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한 몸뚱이가 한 몸뚱이가 아닙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했듯이, 하화중생 하면 상구보리, 상구보리 하면 하화중생이듯이 내 몸속에 지금 수십억 마리의 중생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화중생이라고 하기도 하는 겁니다. 몸뚱이 하나로 비유해서 세상에 탁 나왔을 때는 그 많은 중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선장님들은 배를 잘 가지고 다니셔야 됩니다. 모든 배 밑에는 수레바퀴가 달려서 지금 팔방으로 고정됨이 없이 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몸뚱이가 배고, 발은 배 밑의 바퀴라고 해도 돼요. 그러니 평발이죠.
여러분은 ‘나 아닌 나’가 그렇게 많은 숫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습 없는 나’가 그렇게 많아서 나고 든다는 걸 잘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바깥의 모습 없는, 바로 타인의 모습 없는 세균이 나한테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게 나한테 들어오면 그냥 하나가 돼 버려야 탄로가 나지 않는데 하나가 되지 않고 둘이 돼 버린다 말입니다. 너도 주인이고 나도 주인이고 이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이 몸뚱이를 건강하게 끌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뱃속에 타인이 하나 들어왔으니까요. 그러니 뱃속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죠.
그러니까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꼭 주인공에서 나오는 건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주인공에서 어떤 세균이든지 영계성이든지 유전성이든지 어떠한 문제가 다가오더라도 다 해결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는 보이지 않게 해결을 하고, 보이는 데선 보이는 대로 해결을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역력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합니까? 내 몸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거부터 알아야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광대무변한 법을 가지고 있고 또 광대무변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여러분 자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목에 탈이 생겨서 말이 잘 안 나온다면 목을 자기가 스스로 수술을 하고 또 간이나 심장도 그렇고, 자동적으로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자기 자체는 타인도, 그 타인도 주인공은 둘이 아니라서 내 전화통과 그 전화통과 벨이 같이 울리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을 꼭 안다. 저 사람은 참 안됐는데 내가 저 사람을 건져야지.’ 하는 생각만 하면은 언젠가는 건져질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떡하면 이 도리를 알아서 유체나 유령이나 악령이나 유전이나 또는 생사 열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옷을 벗을 때에도 벗고 싶을 때에 벗고, 입고 싶을 때에 입고 그렇게 자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심과 공에 빠진 상태의 차이
문
스님의 말씀 중에 공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있는데요,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무심의 상태하고 공에 빠진 상태하고 어떻게 다릅니까? 그리고 저희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무기공에 빠지지 않고 멈춤이 없이 바르게 정진해 나갈 수 있도록 꼭 이끌어 주세요.
답
무심은 그냥 일을 하면서도 무심이지마는 공에 빠진 상태는 바로 이 내면세계의 노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목석이죠. 그러니 그런 공에 빠지면 그게 사람입니까, 어디? 이것이 그래서 길잡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에도 속지 말고 바깥에도 속지 마라 하는 것은 안에서 만약에 그렇게 해서 나를 발견했다 하면 둘이 아닌 도리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많은 파도가 일어납니다. 타의에서도 나를 괜히 으르릉거리고 못 먹겠다고 그냥 그냥 그렇게 되고요, 또 자의에서 괜히 화가 나고요, 괜히 하나를 보기만 해도 신경질이 나고 그럭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아하, 거기서 이것이 나를 공부시키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거기다 다시 뭉쳐 놔야 될 텐데, 바깥으로 ‘에그, 저것이 그냥 나를 가지고 이렇게 해서 내가 어떠니 저떠니….’ 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그냥 길길이 뛰게 되죠, 아주. 분하게 되고 이거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고 그냥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안으로는 그렇고, 바깥으로 또 끄달려서 그렇게 해서도 아니 되겠죠. 그러니까 그냥 맹목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거기에만 그냥 생각하고 앉아 있는 사람은 무기공에 빠진다 이 소리죠. 그 사람들은 움죽거리고 살면서 생활에서 그냥 그게 참선인 줄 모르고 아주 생활까지도 버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 그건 바로 무기공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 생활 하나하나 하는 게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게 그대로 좌선이며, 좌선은 모든 걸 맡기고 사니까 마음이 편안한 것을 좌선이라 하고, 바로 뛰고 앉고 서고 자고 하는 게 전부 참선이라 합니다. 그러니 둘로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요 말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내가 만약에 재주가 훌륭해서 여러분의 그 재료를 내가 가지고선 다 이걸 해결을 한다면 여러분은 뭐 가지고 공부를 합니까? 네? 그러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애고(哀苦), 그 괴로움 이런 거를 가지고 하시라 이겁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하시면서 지극한 정성과, 즉 말하자면 보이는 데서도 정성, 안 보이는 데서도 내 마음으로 정성, 항상 거기 놓고 그렇게 가고 그러면은 훌륭한 자기 자력이 되고 또 식구들의 제삼자 하나하나가 바로 같이 들어갑니다. 모든 업과 모든 병과 모든 것이 다 없어집니다.
그래 어떤 때는 그럽니다. 함께 공부해 나가는 도반들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다 함께 나누는 그런 분들을 보거나 이끌어 주는 스님들을 위해서 집에서 키우는 채소라도 깨끗이 해서 올리고 그럴 때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맛있게 먹으라고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기 정성입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하는 겁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다 보니까 ‘아하, 내가 이런 정성이라도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가 남 주는 게 아니고 꽃 한 송이 갖다 꽂아 놓는 것도 남을 주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 해 놓는 데에 자기가 그 백분지일이 없어지고, 또 하나 하는 데 또 없어지고, 하나 하는 데 또 떨어지고, 이렇게 왜 봄이 되면 고드름 쪼끔쪼끔 떨어지는 것 있죠? 그렇듯이 아주 얼어붙은 게 쪼끔쪼끔 떨어져서 녹아요. 그렇게 봄이 올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거는 장담하죠.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그 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