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어렵다. 궂은 일로 알려지는 것은 쉽다. 기사거리의 속성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볼만한 기사다.
안으로 앓으나 겉으로 평정을 보이던 불교계에서 저자의 관심을 끌 일이 발생했다.
순천 선암사에서 불교계를 긴장시킨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부끄럽고 참혹하다. 내막이야 어떻든 몰매 맞기 가장 좋은 곳이 종교계, 특히 불교계다. 조계종과의 대표적 분규사찰인 선암사에서 태고종 내부의 갈등으로 반목해 경찰병력까지 요청했다니 ‘분규속의 분규’라 해야 하나?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까지 가지않고 진정 국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불씨는 남아있는 듯하다. 곪은 것은 터트려야 한다는 세간법에 충실하자면 백번 천번 터뜨려야할 사건이 많다.
터트려서 싱싱한 새살이 돋는다면, 썩은 부위 도려내 혁명처럼 새 둥치가 펄펄 살아난다면, 당장 도려낼 일이 부지기수다.
불교가 종교로서의 면모와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통해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자리를 분명하게 지켜 왔다. 그러나 근현대 들어 잦은 분규를 여과없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회적 지탄을 한 몸에 받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주로 조계종의 내분이 폭력적으로, 비불교적으로 비쳐지면서 국민들에게 준 상처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등축제라든가 템플스테이, 각종 대형 법회 등을 통해 빠른 ‘회복의 능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썩은 것을 도려내는 아픔과 새살을 돋게하는 지혜를 ‘회통’시키는 일이라 견강부회할지 모르나 어떤 경우에도 분규나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드러내 치료하는 방법이 있으면 드러내지 않고 고치는 지혜도 있을 것이다.
선암사 사태, 그간 조계종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온 현장에서 종단의 내부갈등에 의해 경찰병력이 동원되었을 때 불자들은 1994년이나 1998년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분규사찰’의 대명사처럼 불린 선암사에서 내분이 일어나다니 될 말인가. 태고종은 하루빨리 내분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 더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양보하고 화합해 전통종단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