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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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노익상(다큐멘터리 사진가)
살림살이와 그 이야기들을 두루 찾아다니는 일이 직업인 탓에, 남들이 한달에 두어 번 가는 산을 날마다 오른다. 사람에 얽힌 여러 다단한 사연들을 좀 더 헤아리고 이해하는 데 산을 오르는 일이 적잖은 도움이 되어서 버릇처럼 산을 다니게 되었다.
며칠 전, 강원도와 경기도 어름에 있는 여러 봉우리와 그 일대 고을들을 돌아보는 능선 종주를 하면서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사람 본 것이 반가웠고 그이들도 반색을 하는 눈치여서 뜻하지 않게 점심을 함께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서로의 처지를 밝히게 됐고 뜻밖에도 두 사람은 겉보기와 달리 칠 순 가까운 노인이었다.
계란말이와 오징어젓갈, 열무김치, 그리고 제육볶음 등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산길은 상당한 산행 경험이 있어야 찾을 수 있는 깊고 험한 곳이어서 노인이 찾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못 궁금해 했는데 육군 상사로 전역했다는 분이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 달 중순쯤 백두대간 강원도 구간을 종주할 작정이고 이 산행은 그 거사를 대비하기 위한 수 개 월에 걸친 훈련이라는 말이었다. 계란말이를 먹다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그 다음 말이 더 무릎을 쳤다. 여태 군인연금으로 편하게 살다가 배우자와 혼기에 이른 딸이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자 죽을 결심까지 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본 텔레비전에서 한 장애인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장면과 그이들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는 말을 담담히 들려 준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국인 우주인 선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전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두 사람도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들 또래 노인이 이번 체력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넌지시, 그것은 부유한 처지여서 가능한 일 아니었겠냐며 딴죽을 걸어 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물론 경제적인 형편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재벌가문을 이끌어 오면서도 많았을 법한 유혹과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잠시 흔들렸던 그간의 생각이 다시 바로 잡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덧붙여, 그 노인이 우주인으로 선발 돼 우주공간을 여행하기를 바란다면서, 자신들도 차분하게 준비하여 두타, 청옥, 오대, 점봉, 설악산을 넘어 마침내 향로봉에 이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종주에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그 즈음해서 갖게 되었다. 이렇게 단정하듯 결론을 내린 데는, 해거름까지 함께 한 산행에서 자연스레 든 생각이기도 했다.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확인한 것도 뒷받침 되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그 나이가 무색하게 분명하고 실천 가능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실제로 여러 달에 걸친 훈련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나이와 체력 그리고 그들이 처한 환경까지도 이겨내고 있어서였다.
내 책상위에는 지금 그 우주인 선발에 관한 내용과, 86세 된 일본 여배우가 아직도 현역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는 기사가 놓여있다. 천천히 읽어내려 가다가, 다음달 즈음해서 이 분단된 국토의 마지막 봉우리 향로봉에 닿아있을 그들을 생각해 본다. 또래 노인이 우주인 선발에 나선 것처럼, 마침내 향로봉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본인의 만족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읽히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와 계층, 그리고 이념에서 오는 차별과 내침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값진 일이기도 하다. 대수롭잖게 치부해버렸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광고 카피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다.
2006-09-09 오전 10: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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