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불자들이 조석으로 드리는 예불문에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이 있다. 마음을 다해서 시공 모두에 가득찬 부처님께 귀의한다 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제망찰해는 인드라망의 번역이다. 원래 인드라는 인도사람들이 좋아하는 수 많은 신 중의 하나인 제석천왕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가호하는 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드리워진 구슬코마다 구슬이 있는데 이 구슬이 서로 서로를 비추면서 우주 삼라만상을 비추는 모습이다. 이러한 인드라망을 부처님께서는 화엄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즈음 말로 번역을 해 보면, 우주 삼라만상(생명, 무생명, 유기물, 무기물에 이르기까지)이 서로 다른 것과 떨어져서 개체성을 발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동쪽은 서쪽에, 시간은 공간에, 물질은 에너지에, 무생물은 생물에, 유기물은 무기물에. 서로 비추어 빛을 내는 인드라망의 구슬과같이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양자역학과 상대성을 발견한 과학자, 그리고 무한을 탐구하는 수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서로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태양의 움직임, 아침마다 만나는 지하철의 사람들, 발에 걸리는 돌부리,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에 이르기까지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드라망은 가르쳐 주고 있다. 가끔 내가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정반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 그 사물의 존재여부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내가 관찰해야만 관찰하려는 사물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관찰자와 사물이 같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얽혀있는 것이지, 내가 있든 없든 우주는 존재할것이라는 생각은 양자역학적인 사실과는 대치되는 틀린 상식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 서양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의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지금 많은 관찰과 실험은 양자역학의 세계관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관찰하려는 의도가 마음에서 나왔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컴퓨터 과학자들은 이러한 인드라망의 구슬을 하드웨어, 이 구슬이 서로 비치는 방법을 소프트웨어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드라망에 얽힌 하나의 인연법칙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개체성과 전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본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벽암록>에서 더위를 피하려면, 더위가 나를 죽이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있다. 더위가 한 풀 꺾인 가을 초입, 가끔은 성장을 멈추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자연과 같이 가만히 인드라망에 얽힌 우주의 인연과 다르지 않은 나를 관찰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