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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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앞 못 보는 어느 청년 이야기/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는데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어떻게든 시력을 되찾게 하려고 그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 보내던 청년은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큰스님이 법회를 여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스님을 친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운명을 탓하며 사람다운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느니 어떻게든 덕이 높은 스님을 뵙고 그 분의 법문 한 자락이라도 들어보고 죽는 것이 그나마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그들은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스님이 법문을 여는 도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지 청년은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큰스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거나 가사라도 한 번 만져본다면 그 고되고 긴 여행은 의미가 있을 성 싶어 청년과 어머니는 인파를 헤치고 가장 앞줄로 나아갔습니다.
스님은 사람들 틈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가 청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동안 어떤 치료를 받아왔는지, 지금의 상태는 어떤지를 세심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스님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 청년을 한번 검진해줄 것을 부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 날 의사는 믿기 어려운 희소식을 하나 가지고 청년을 찾아 왔습니다.
어떤 젊은 스님이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망한 자의 안구기증도 아니고 젊디젊은 스님이 제 눈을 떼어서 주겠다는 제안인 것입니다.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환호성을 지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청년은 무덤덤하였습니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앞을 응시하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젊은 스님은 며칠 전에 저를 찾아와 안구를 기증하겠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는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오를 듯 기뻤습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그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몇 해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는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저로 인해 그 고통의 길을 걸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스님의 안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바라며 어머니와 함께 가재도구를 다 팔아서 떠나온 순례 길이었습니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기적이 청년 앞에 벌어지려는 찰나였습니다. 청년은 손을 내밀어 제 몫의 행운을 움켜쥐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행운을 사양하였습니다. 자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자·비·희·사’
이것은 내가 내 이웃과 낯선 사람 그리고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까지 품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입니다. 흔히 ‘자비심’ 또는 ‘자비’라고 줄여서 말합니다.
자(慈)는 다른 사람을 벗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정 어린 마음으로 가깝거나 낯선 이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비(悲)는 나의 벗에게 슬프거나 고통스런 일이 생기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참 안됐구나!”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게 일어난 일처럼 여겨서 내 마음이 아프고 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희(喜)는 나의 벗에게 생긴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捨)는 담담한 마음입니다. 맘껏 아파하고 맘껏 기뻐하지만 감정에 이끌려서 자신을 놓쳐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톡톡 털어 순례 길에 나선 앞 못 보는 청년은 누가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구호와 자비의 손길에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안구기증을 제안한 젊은 스님을 염려하는 그 마음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자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아픈데 다른 이까지 아프게 할 수 없고, 다른 이가 아플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자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청년의 이야기는 <용서>(달라이 라마ㆍ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오래된 미래, pp.185~190)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2006-09-09 오전 9: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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