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깨달으면 부처!
(지난 호에 이어서)
한마디 더 하자면,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 때문에 불교라면 아주 자지러져서 아주 불교국으로 됐지 않습니까. 생활을 불교식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불교에서 따 간 것이 뭔 줄 아십니까? 이 장삼을 하오리로 만들었고, 오조 가사를 사무라이 총받이로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약습니까? 처음에는 행전을 당코바지로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각반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발우공양을 공기밥으로 만들었습니다. 글도 한국 사람들한테 배운 겁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도 정신을 잃지 않고 혼을 뺏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남이 향을 꽂으려고 자기가 꽂아 놓은 것을 빼 버리면 그냥 뭐 야단이 나고, 물 떠다 놓고 초 켜 놓고 이래야만이 정성들이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남이 향을 켜 놓고 초를 켜 놓았다 하더라도 그 초 한 자루에 수천수만이 밝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남이 아닙니다. 남이 꽂아 놓은 거, 내가 꽂아 놓은 거, 이게 없습니다.
그러니 침착한 마음으로, 서로 먼저 하겠다고 다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정성이 지극하면 여러분의 마음의 등이 밝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뒷면에 영원한 밝음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의 인등을 켜신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밝을 것이고 공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백일기도 드리고 난 뒤에는 지구가 안 돌아가나요? (대중 웃음) 하하하…. 백일기도 드릴 때만 지구가 돌아가고 백일기도 드릴 때만 자기가 먹고 모두 움죽거리나요? 백일기도 드리고 난 뒤에는 어떡할 겁니까? 불이 꺼져도 괜찮습니까?
이 세상 진리는 항상 밝고 항상 움죽거리고 있어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불바퀴는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사는 이 혹성, 이 별성이 모두 살아나가고 운동하는 데서 바로 에너지가 배출되죠. 그러면 아까 자석에 모든 것이 끌려와 붙는다고 얘기했듯이, 그 불바퀴는 크니까 다 붙어서 하나로 돌아가면서 바로 법바퀴가 그것을, 우리가 전력을 빼서 쓰듯이 그렇게 빼서 바로 생산을 해내는 거죠. 멸하고 생산되고 멸하고 생산되고 이러죠. 이게 바로 인간이 살아나가는 작용이죠.
이런 진리를 탐구할 생각은 안 하고 모두 남한테 기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살림살이 속에 부처가 있고 법신이 있고 화신이 있어서 모든 일을, 일체 만법을 다 들이고 내고 해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항상 자기 집은 주인도 없이 비워 놓고 항상 남한테다가 기대면서 살고 있죠. 물질에 기대고 이름에 기대고, 그저 여기 가서 빌고 저기 가서 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뿐인가요? ‘요기다 놓지 않아서 우리 남편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아이구, 요기다 놓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래서 땀으로 뭉쳐진 종이짝 몇 개 가지곤 벼르면서, 여기 안 놓으면 안 되니까 요거 별러서 놓고 요기 놓고 조기 놓고 그러다 보니까 아주 고통스럽죠. 우리 인간이 진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뛰어넘는 공부를 하는 것도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에 그렇게 끄달리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 믿는 것마저도 그렇게 편안치 못하고 고통스러워서 어떻게 종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난 여러분한테 무슨 석달 열흘 기도를 드려라, 인등을 켜라, 뭘 해라 뭘 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또 생각할 게 있습니다. ‘나는 절대 팔자 운명이 따로 없다. 내 생각에 의해서 팔자 운명이 붙는 거지 내 생각이 시간과 공간이 없이 돌아가는데, 공했는데 내게 팔자 운명 붙을 자리가 어디 있으며 유전성 붙을 자리가 어딨으며 병 붙을 자리가 어딨나. 가난 붙을 자리가 어딨고 우환 붙을 자리가 어딨고 날짜를 정해서 가지 않으면 무슨 사고가 일어난다 이러는 게 어딨느냐. 집을 짓는데 구랑신이 내려서 집을 못 짓는다 하는 게 어딨느냐.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지.’ 왜 이렇게 패기 있게 못 나갑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서도 불자며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까? 탈만 썼지 어떻게 인간이라고 보겠습니까?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라고 보겠습니까? 어떻게 부처라고 보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도요, 말을 하다 보니까 목이 말라서 이 물을 먹어야 괜찮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생활하는 데에 참, 배고픈 일이 너무도 많고 애처로운 일이 너무도 많고, 쓰라린 일이 너무도 많고 터무니없는 일이 너무도 많고, 여러분 사시는 데에 천차만별로 닥치는 그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얘기를 못하는 비밀도 많습니다. 오히려 친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어도 정말, 자식한테는 털어놓을 수 없고 부모한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사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의 참주인이 없다면 어떤 것도 커버해 나갈 수 없고 몸 안에서 병이 들어도 커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속에 있는 중생들이 모두 자기와 더불어 한마음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한몸, 한마음 말입니다. 내 마음을 그렇게 한마음으로 문을 열어 주니까 거기서 생각할 때에 ‘아 참, 둘이 아니라는데….’ 하고 그걸 알게 되면 죽어 가던 세포도 자꾸자꾸 살아나게끔 바로 작동을 하죠.
여러분! 어떠한 병이라도 지금 병원에서 35%는 고칠 수 있어도 그 외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으로 바로 자기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한마음 속에서 병이 난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뭐든지 거기다 맡기고, 자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부지런히 움죽거린다면 그게 바로 시자가 주인의 심부름하는 거와 마찬가지죠. 거기다 맡기고 부지런히 움죽거려 주는 거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데 ‘아이구, 그게 뭐 나발 같은 소리야! 그까짓 것, 나는 광대한 부처님 앞에 가서 빌기만 하면 부처님이 그냥 봐 줄 텐데, 뭐.’ 요렇게 생각하진 마세요.
여러분이 첫째는 나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을 믿고 다 맡겨야 하고 그 다음에, 맡겨서 밝게 나를 발견했을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공부를 하기 위해서 또 맡겨야 합니다. ‘나는 견성했다’고 고개를 탁 들고 내가 나라고 이렇게 한다면 둘이 아닌 도리 공부는 글렀죠. 그리고 미해지죠. 세 번째는 둘이 아닌 걸 알았으면, 아까도 얘기했지요. ‘네 자식 내 자식이 둘이 아니다’는 그 도리를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시듯이 개구리가 도와 달라고 그랬을 때는 개구리가 되어 한마음이 돼서 응해 주시고, 병신이 달래든 또는 못생긴 사람이 달래든 잘생긴 사람이 달래든, 부자가 달래든 가난한 사람이 달래든, 새가 달래든 곤충이 달래든 짐승이 달래든,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대로 자기가 돼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돼 주려니까 작으면 작은 대로 내가 작아져야 똑같이 되죠? 그러니까 건져지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때의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라고, 뭐가 됐을 때에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돼지, 소 이런 짐승이 됐을 때 부처라고 할까요, 사람이 됐을 때 부처라고 할까요? 그래서 ‘부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다’라는 얘깁니다. 했던 말 되하고 했던 말 되하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아서 들으세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 주인이 없다면 안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찾아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주인이 있으니 거기다가 맡겨서 실천을, 실험을 해 보십시오. 거기서 할 수밖엔 없으니 거기다 맡기세요.’ 이렇게 하지 내가 ‘기도를 하라’ 뭐 ‘정성을 들여라’ 이럽디까?
그래서 세 번째는, 그렇게 되니 그것이 바로 성불이며 열반이며, 구경경지에 이르러서 앞뒤가 없는 불바퀴를 넘어 참으로 영원한 밝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래서 그 경지를 얻는다면 바로 평등공법에 해당이 되고, 고 다음에는 칠보활궁공법에 해당이 되고 고 다음에는 팔수레공법에 해당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정말 도리천, 즉 도리천의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평발이니 평손이니 평눈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 종합된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 자유인이 바로 부처이자 바로 신이죠. 그냥 보통 자기를 불러도 ‘자신’ 이러죠. 여러분을 끌고 다니는 자신이 있는데 왜 타신을 믿습니까? 자신부터 알아야 타신도 둘이 아니라는 걸 알죠. 그래서 나는 무식한 사람이니까 “내 집부터 전화통을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전화도 올 수 있지.” 이런 말을 하죠.
여러분이 법당에다 음식을 차려 놓고 그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항상 방편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찰떡을 해서 둥그런 그릇에 딱 담으면 그게 그냥 둥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그 둥그런 떡 한 그릇이 전체를 먹이고도 남는다는 뜻을 아시라고 항상 그럽니다. 내 조상 따로 있고 부처 따로 있고 중생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법당에 올라가시면 내 마음으로 부처든 나든 조상이든 뭐 중생이든 할 것 없이 그냥 전체 둥굴려서 지극하게 한다면 일 배를 드려도 삼 배, 삼정례 한 것보다도 더 많아지고 백팔 배를 했다 해도 일 배도 한 사이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여북하면 달마 대사께서 양 무제더러 “당신은 공덕이 하나도 없다.” 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약사발을 안겨서 죽일 건 뭐 있습니까, 또. 몸이 죽어 없어진 뒤에도 바로 그 몸을 해 가지고 짚세기 한 짝은 거기 두고 짚세기 한 짝은 주장자 끝에 턱 메고서 가다가, 나라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을 뭐라고 그러죠? 입에서 뱅뱅 돌고 또 안 나와요.
▲대중 가운데서: 사신.
▲큰스님: 네, 사신이지요.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오는 도중에 딱 달마 대사를 만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죽어서 없어졌는데도 그 모습을 다시 해 가지고 양 무제를 가르치기 위해서 터억 보였으니 어떻습니까? 어버이라는 마음은 죽으나 사나 여러분을 아마…. 지금도 부처님이 내내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것이 바로 부처가 살아 계신 것이니까요.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열반하셨다 하는데 열반한 게 아닙니다. 사대가 흩어졌을 뿐이고 여러분이 또다시…, 그분이 바로 여러분이니까요. 하하하…. 그 뜻을 아실 거예요, 언젠가는요. 모르시는 분은 모르실 테죠.
그러니까 법당에 가시면 부처님 형상이든 어떤 물질이든 마음에 둥글려서 둘 아니게 만드세요. 여러분이 그 공부를 하게 되면 ‘진짜 부처가 저거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우리가 처음에 공부할 때는 모셔 놓은 부처님을 내 마음 가운데 한데 둘 아니게 굴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하! 방편으로 놓았든 뭘로 놓았든 하여튼 진짜 부처구나!’ 이렇게 알게 돼요. 진짜 부처니까요.
예를 들어서 각자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역대 조사들이 그림을 그려서 놓거나 형상을 조성해 놓은 것을 “이거는 사리가 없다.” 그러고선 갖다 태워 버리질 않나, 임신을 못해서 어린애를 좀 낳게 해 달라고 정성을 들이면 다기 그릇에다 손을 터억 넣어 가지고 밥을 갖다 뚤뚤 뭉쳐서 부처님 입에다 척 붙여 놓곤 “이 사람이 지금 어린애를 달래니 이거 먹고 해 주라.” 그러고선 터억 하니 걸망을 지고 털럭털럭 가면서 “인연 있으면 요다음에 어린애 낳거든 또 만나자.” 그랬다는 거죠. 낳아서 업고 와서 보니까 그 스님이 또 와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깨달으면 부처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이나 그 몸이나 둘이 아닌데 그 사람이 모르고 스님들이 모르니까 방편으로 “야, 너 부처지?” “예.” 자기가 대답해요, 또. “너 부처지?” 그러니까 “예.” “부처걸랑 그럼 이거 먹고 해 줘.” 그러고선 그냥 탁 입에다가 붙여 놓고는 가는 거죠. 그게 얼마나 멋집니까. 참, 그 멋지죠. 삿갓 쓰고 주장자 하나 들고 평발로서 바리때 하나 들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아무 데고 그저 내 각장 장판인 줄 알고 턱 드러누워서 편안하게 자고 먹고는 소화시키니, 똥마려우면 똥 누고 오줌 마려우면 오줌 누고 맘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공부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먹고 똥 누고 이러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밥 먹고 배설하는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일체 생활을 하면서 생각 한번 잘하고 소화를 잘 시킨다면’ 이런 소리와 똑같은 얘깁니다. 생각 한번 잘하면 먹는 것이고 먹으면 소화는 저절로 되는 겁니다. 만약에 먹고 소화 못 시키면 체합니다. 그러니까 구덩이에 빠지죠.
여러분이 불교를 잘 생각해서…,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있는 거지 여러분 빼놓고 불교가 어딨습니까? 여러분 빼놓고 부처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부처가 어딨는지 봤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바로 부처를 보고 믿게 되고 듣고 보고 이렇게 행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질문할 것 없어요? 하지 않아도 좋아요.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나는 믿으니까 얘기하세요. 여러분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나는 믿어요. 머리가 발이라고 해도 믿고요, 발이 머리라고 해도 믿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 몸은 물질이고 물질 아닌 마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 몸이 실체가 아니며 마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이라고 한들 어떻고 팥이라고 한들 어떻습니까? 콩이라고 생각한다면 콩인 것이고 팥이라고 생각한다면 팥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에 뛰어넘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거 한마디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여러분이 물질세계에서 그렇게 관습에 젖어서 기복에 젖어서 산다면 요다음에 몸뚱이 속에 인과응보로 뭉쳐진 것이 수없이 늘어나 가지곤, 화해 가지곤 내가 죽은 뒤에 턱하니 나와서 눈앞에 벌어집니다. 살아 있을 때도 수없이 자꾸 파워를 일으키고 자꾸 입력됐다가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데, 죽어서도 고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그냥 크게, 요만한 벌레도 크게 돼 가지곤 눈에 다 보이니까 한 발짝도 못 들어서요. 자기가 인연 지은 대로 나오는 거니까요. 머릴 풀어 산발을 한 사람으로 나오죠, 벌레로 나오죠, 짐승으로 나오죠, 독사로 나오죠. 모두 그렇게 나와서 늘비하게 널려 있으니 그 길밖에 없는데 한 발짝이나 떼어 놓을 수 있겠어요? 그거 이해가 안 가시죠? 그게 일 단계예요.
이 단계는 뭐냐? 여러분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죠. 일 단계에도 뛰어넘는 거지만 그것도 마음으로 뛰어넘으면 될 것을 내가 항상 의식으로 물질로다가 아주 관습이 됐기 때문에 젖었어요. 그래서 ‘여기에 배가 와야 건너가지 내가 그냥 어떻게 건너갈 수 있나? 빠져 죽지.’ 이런 생각으로 영혼들이 그냥 주욱 기다리고 있는 거죠. 어때요? 거짓말 같아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기독교나 가톨릭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고 여기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저 강을 건너가서 우리 같이 만나자, 같이 건너가자.’ 하는 거죠. 그러니 죽어서도 고런 마음들을 가지고, 내 모습이 그대로 있는 줄 알고 글쎄, 배가 올 때를 기다리니 오백 생을 기다리면 옵니까? 그러니 천도가 생긴 겁니다. 여러분은 요새 그러한 도리를 배우니까 좀 아시겠지마는 옛날에 돌아가신 분들은 그런 걸 몰라서 그저 요런 거 하나 조런 거 하나 일일이 따지고 덤비고 그냥 먹으려고 하고 그랬겠죠.
또 그뿐입니까. 우리가 아까 불바퀴라고 얘기했죠. 통로인 거기를 마저 뛰어넘어야만 우리가 이름 해서 성불이라고 하고 또 자유인이 될 수 있고 영원히 끝간 데 없이 밝음을 얻으리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타 죽을까 봐 거기 못 들어가거든요. 타 죽을 몸이 있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있다는 거죠. 의식이 그렇게 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했으니 놔라 놔라! 쉬어라! 놔라!” 그냥 수없이 그러셨죠.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그냥 어린애도 돌보지 않고 남편도 돌보지 않고, 또 남편은 부인을 돌보지 않고 만날 백팔 배나 하고 염불이나 하고 경이나 외우고 구석방에 들어가서 염하기나 하고 이래야만이 불교 공부를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인제는 좀 놓으십시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림을 요렇게 만들어 놓고 아니, 지금 애들이 학교에 나가고 남편도 나가고 그러는데, 그냥 먹거나 말거나 “얘들아, 여기 차려놨으니 먹어라.” 그러곤 그냥 홱 나가야겠습니까? 훤해요, 아주! (대중 웃음) 그거 오순도순 밥 먹고 오순도순 얘기하고 오순도순 친절하게 참, 말을 해서 내보내면 그날 일도 잘돼요.
그런데 자기 일 보느라고 그렇게 하다 보면 그게 쌓이고 쌓입니다. 그게 바로 애정에 굶주린다는 거죠. 그래서 잘못 나가죠. 중학생쯤 되거나 고등학생쯤 되면 잠잤던 것이 바락바락 일어나죠. 그렇게 해 가지고 잘못되는 거를 누구한테다 항거를 합니까? 하다못해 시장을 가더라도 참, 애들이 들어오거나 남편이 들어온다면 “내가 지금 당신 좋아하는 거 사러 시장에 가요.” 한다든가, 애들한테도 ‘나 이렇게 갔다 올 테니 너희들 냉장고에서 요런 거 꺼내 먹고 있어. 기다려. 참 사랑해.’ 하고 요렇게 써서 냉장고 문에나 붙여 놓고 뽀뽀 한 번 해 놓고 가면 이탈될래야 이탈될 수가 없지요. 그건 떠다밀어도 안되죠. 아주 접착제로 붙어 있듯이 고렇게 붙어 있는데요. 그런데 어디로 이탈이 됩니까?
그러니까 모든 책임은 서로에게 있으니 누구에게 탓을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남편도 자식들한테나 아내한테나 아무리 바깥에서 피곤하고 그렇더라도, 남자는 가슴이 넓지 않습니까? 넓어서 넓은 게 아니라 남자니까요. 못났든 잘났든 내 아내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나를 생각해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그저 아내가 늦게 들어오거나 이러더라도 이해해 주고 “여보, 밥이나 먹고 다녀? 배고프지 않아? 내가 꺼내 줄까?” 하는 그 말 한마디에 고만 그 하루 동안 고통받았던 게 싹 씻어지죠. 말 한마디에 구덩이에서 빠지느냐 구덩이에 들어가느냐입니다. 여러 가지죠. 내가 지금 여러분한테 말하는 것을 ‘저 스님이 불교는 말 안 하고 별말을 다 하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사는 게 불교니까요. 돌 하나도 불교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은 전부 부처가 돼서 질문이 하나도 없군요. (대중 웃음) 한 시간이 넘었는데요. 하여튼 우리가 인연이 돼서 여기에 지원을 내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으로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다 천백억화신으로서 보살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둘째는 그 작업을 그렇게 해야만이 여러분 건강도 되찾을 수 있으며 또 가난도 소멸시킬 수 있으며 또는 가환, 우환, 될 듯하면서도 안되는 그런 모든 가환도 다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그 모든 것이 입력된 도청기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대중: 예.
▲큰스님: 우리 이 자리에서 서로 한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이만…. (대중 박수)
※위 법문은 1991년 8월 11일 국내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