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커피가 유입되어 런던, 파리, 비엔나 등에서 커피가 대중화된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에도 독일인들에게 커피는 그리 매혹적인 음료가 되지 못했다. 이것은 독일인의 대표적인 음료인 맥주가 한 요인이었다. 이들은 맥주를 알코올음료로 음용하기도 했고, 식사대용인 수프로 먹기도 했다. 혹은 설탕과 우유를 섞어 마시는 등 맥주는 기호식품이라기보다 가정생활의 필수품이었다.
한때 북유럽에는 배가 나오거나 뚱뚱한 사람은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 저명인사거나 부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마른 사람은 허약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사회 풍조가 있었다. 그들에게 맥주는 오랫동안 갈증을 해결하는 것만이 아닌 포만감을 주는 삶 속의 제왕이었다.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파리에 거주하면서도 커피나 차, 초콜릿을 먹지 않고 맥주 수프를 즐겨 먹는 등 독일인들의 생활 풍습을 고수하여 선조들이 마시고 즐겨 왔던 것을 소중히 지키려 했다. 철학자이며 애국자인 피히테는 사회전반에 걸쳐 절제의 분위기를 조성해, 사치품이었던 커피의 소비를 억제하는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검소한 생활이 일반화된 독일에서는 커피가 정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18세기 커피가 왕궁과 공작의 저택을 중심으로 상류층인 부르주아 계급과 젊은 여성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한편으로 외부 세계와 교류가 활발했던 라이프치히는 국제교역장으로 상업과 인쇄술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교역품이 모이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매년 국제 박람회를 개최해 외국 상인들이 수시로 내왕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커피의 음용이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해져 커피하우스가 번창하게 된다. 커피 하우스에서는 소규모의 음악회가 자주 열렸고, 젊은 여성들이 커피를 좋아해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신 탓으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기도 했다.
이런 세태를 풍자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커피칸타타’는 아버지 올드 웨이즈와 딸 리스헨의 커피음용에 대한 분쟁을 다룬 곡이다.
19세기 이후 베를린의 중산층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에 간 뒤,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하루에 열잔 이상씩 마신 것으로 보면 커피는 연한 설탕물과 같은 음료로 대화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커피 타임은 가사로부터의 자유와 즐거움을 주는 시간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는 주로 유명한 사람에 대한 소문이나 험담으로 소문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 당시 유행어인 카페클라치(Kaffeeklatsch)란 가십(gossip)이나 스캔들을 의미하며,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카페슈베스터(Kaffeeschwester)라 했다. 이렇게 카페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고 소문을 만드는 사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고 주 고객은 여성들이었다. 이로 인해 커피는 여성의 음료이며 커피를 만드는 일조차도 주로 여성의 몫으로 인식되어,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남성들에게 일과 후 휴식과 즐거움을 주는 것은 단연 맥주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여성들이 제과점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커피를 즐기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콘디토라이(Konditorei)라는 제과점은 중산층 여성들이 자유스럽게 케이크, 토르테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새로운 풍조를 만들어 냈다. 한편 근교에는 소박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커피 가든’이 생겼다. 이곳은 여행할 때 전원적인 풍경 속에서 소박한 분위를 연출하는 장소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