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
잠깐 숨을 돌리고 그동안의 <금강경>을 다시 정리해 보자. 1장은 법석(法席)을 폈다. 붓다의 탁발과 공양으로 법의 얼굴이 다 드러났다. 그런데 그 소식을 코앞에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2-5장까지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제 2-43강)
설법은 충격적이다. 불교에 일구월심 의지해온 사람들에게 <금강경>은 “여래는 없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없을 리가 없다. 다만,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할 뿐이다.” 실제 <금강경>은 “여래가 여기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뿐, 존재 자체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여래는 있다. 다만 그는 이런 저런 ‘몸’으로 오지 않을 뿐이다(不可以身相得見如來). 원효가 관음을 친견치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낙산사로 길을 떠난 것도 어린 마음인데, 그는 길에서 만난 여인네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생리대를 빤 더러운 성수(聖水)를 버리고 ‘깨끗해 보이는 새 물’을 청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여래는 어디 있는가
그럼, 진정 여래는 어디 있는가. 육안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눈에 비치는 사물은 우리 욕망의 투영이고,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의 만고 법문처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래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여래가 되어야 한다는 청천벽력이 요구된다. 그때 보이는 여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야부는 이렇게 귀띰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그런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 이미지(相)에 붙들려 있거나, ‘지금 여기’ 너머를 추구(求)하는 것은 허망한 시도라네. 그렇다고 여래는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은 절망의 구렁텅이! 보라, 저기 뚜렷하고, 촘촘해서 한 치 틈도 없는 것을…. 차가운 빛 하나가 태허(太虛)를 싸그리 태워버렸네.”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 處. 有相有求俱是妄, 無形無見墮偏枯. 堂堂密密何曾間, 一道寒光 太虛.
중생의 눈을 한 채로 여래를 보겠다고 발돋움 하지 말라. 그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필칭 여래에게 32상 80종호가 있다 하나, 그 표징들은 중생들의 눈에 다만 그릇된 인상을 줄 뿐이다. 32상 80종호는 여래의 표징이 아니라 마군이의 표징이다. 우리가 여래의 ‘이미지(相)’에 붙들려 있는 한,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없다. 여래는 바로 그 이미지와 기대를 벗어날 때, 어느새 우리 앞에 와 있다. “여래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때 너는 여래와 대면할 것이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럼 대체 여래는 어디 있는가. 그는 우리가 상상도 않던 곳에,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 있다. 하찮은 들풀, 내가 내다 버린 쓰레기, 그 속에 여래가 있다. 어느 선승은 이를 “풍류가 아닌 곳에 풍류가 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본격 전하고 있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 경전의 본래 이름이 <잡화경(雜花經)>, 즉 허접한 꽃들의 축제였다고 말해준 바 있다. 선재동자는 세상이 하찮다고 생각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그 선지식 안에 창녀와 승려가 함께 들어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손가락 튕기듯 법을 깨닫는다. 이 모든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래의 이미지, 그 함정
여래의 ‘이미지’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 그것은 우리의 누추한 삶에 희망을 주고, 이 세상의 고통과 불완전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었지만, 그러나 또 한편, 자신을 하찮은 범부로 낙인찍고, 이웃을 한심한 중생으로 생각하며, 내게 단 하나 주어진 삶에 합당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치 못하게 했다. 그렇지 않은가.
혜능의 돈교(頓敎)는 그 오랜 비관의식, 자기비하의 감옥을 타파하려는 것이다. “네가 바로 여래이다(心卽是佛)!” <육조단경>은 이 한 마디를 하고싶어 지어졌다. <금강경> 5장 구결에서도 그는 신신히 당부한다. “일체 중생이 같은 진성(眞性)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다들 때 하나 묻지 않은 본래 청정(淸淨)이라는 것 그것을 믿어라.” 그 믿음은 우리가 여래와 범부, 너와 나의 구분(分別)로 생긴 이미지들에 결박되지 않을 때 얻어질 것이다. 혜능의 당부가 이어진다. “이미지에 붙잡히지 말고(不住相), 일체처(一切處)에 평등행(平等行)을 행하라!” 그 실천과 더불어 “여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는 실상(實相)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5장으로 하여 설법이 끝났다. 그렇지만 대부분 이 말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설명이 더 붙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첫 마디를 못 알아들으면 다음 말도 못 알아듣기 십상이다.
축복 아닌 축복이여
6장은 이 돈교의 설법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체 누가 그 말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깨달음이 떠나고, 실천이 떠나고, 지식도 떠나고, 마침내 외형과 암송만 남은 이 궁핍한 시대에... <금강경>은 그런 시대에도 “여래는 오지 않는다”는 선언에 담긴 불법의 최상승을 이해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 사람은 무한한 축복을 얻는다. 그 축복은 자기 안의 불성과 자기밖의 우주가 일여(一如)로 합주하는 우주적 찬가에 비길 수 있다. 여기 여래들이 관객처럼 둘러써서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유의해야 한다. 이 축복은 그러나 축복이 아니다. 그 축복을 자부하거나 달콤하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자기의식의 함정으로 떨어지고 만다. <금강경>의 나머지는 이 역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7장은 다시금 반복한다. “최고의 축복은 그런 점에서 획득할 수도 없고(不可取), 또 쥐어줄 수도 없는(不可說) 물건이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하라
8장은 이 역설의 소식을 품고 실천하는 것이, 또 남에게 들려주고 일깨워주는 것이, 다이아몬드를 수레째 쏟아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보시라고 했다. 왜냐. 모든 부처들, 그리고 그들이 얻은 깨달음은 다 여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9장은 “얻되 얻음이 없고, 들어서되 들어섬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변주로 보여준다. 곡명은 소승사과(小乘四果), 즉 “깨달음에 이르는 네 단계”이다. 수다원은 삶의 물길을 거슬러 성스런 흐름에 들어선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 수다원은 자신이 성자의 트랙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식하거나 자부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수다원일 수 없다. 사다함에서 아나함, 그리고 마침내 아라한으로 열반의 계단을 오르더라도, 그는 어떤 형태의 아상(我相)도 짓지 않는다.
아라한은 마침내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불건전한 정념과 업을 다 털고 마침내 무욕(無欲)의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는 세상과도 다투지 않고, 자신과도 갈등하지 않는 아란나행의 성자가 되었다. 그 역시 자신의 성취를 의식하지 않는다. 만일, 의식한다면, 그의 의식은 ‘얻음’과 ‘얻지 않음’ 사이에서 자기갈등을 만들어낸다. 미세한 것이라도 갈등이 있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라한, 혹은 ‘다투지 않는 자’라고 불릴 수 없게 된다.
<금강경>은 이렇게 다시 한번 여래법(如來法)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남긴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그 삶을 사는데 착수(着手)하는 일이다. 혜능이 구절 구절 당부한다. “입으로만 외지 말고, 그 ‘얻음 없다’는 법을 행동으로 완성하자(口誦心行了無所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