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 속에 살고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SF 영화는 물론 수백 수천 년 전의 역사 사극을 리얼하게 만들어 낸다.
인터넷에서 공양도 하고 예불도 할 수 있는 종교 사이트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이러한 일련의 문명과 문화는 인간의 진화에 많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다윈은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생물체 또한 그에 맞는 적응과 진화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의 과학문명은 이러한 자연의 선택을 부정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회적 혹은 종교적 상식은 에너지의 남용 때문에 결국은 인간이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석유를 포함한 화석 연료의 남용으로 지구의 이상기후가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올 징후도 곳곳에서 보인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달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원자력 폐기물의 안전 처리기술, 수소저장 기술을 연구한다. 또한 생물의 유전자를 바꾸어 인간이 원하는 특징을 가지게 하고, 생노병사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단백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연구에 매달린다. 이미 현재의 인간은 100년 전 인간과 달라져 있는 모습이듯 수백 년 후 인간의 모습은 지금 인간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진화돼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대응했던 로마 가톨릭의 모습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현재에도 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의 도전은 끈질기다. 마치 진화론에 의해서 특정 종교가 부정되는 것처럼 인간이 다른 포유류에서 진화되어 왔다면 창조주가 흙에서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창조했다는 근본을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정 종교에 비해서 불교의 관점은 매우 관대하다.
불교에서는 진화라는 현상을 특별한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차피 육체(혹은 물질)는 실체가 없고 이를 관장하는 것은 오직 업이라는 인과의 법칙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인연의 그물로 파악함으로써 진화라는 현상조차도 무상의 그물내의 인연법칙 안에 있다는 말이다.
종교적 천재조차도 상식적인 경험에 근거한 오류를 범한다. 선객들이 나침반으로 여기는 고봉 스님의 <선요>에서는 “이는 마치 가벼운 깃털보다도 무거운 쇠가 더 빨리 떨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비유를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구의 만유인력에 의한 가속도는 무게와는 무관하다. 또한 성경에서 “하늘에 나는 새도 조물주가 먹여 살린다”고 했다. 그러나 한가히 나는 듯한 새도 사실은 먹이를 찾고, 짝을 쟁탈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대부분은 먹이와 짝을 찾지 못하고 당대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말이다.
과학기술은 앞으로 끝없이 발전할 것이며 인간의 영혼조차도 진화시키려할 것이다. 이러한 때 참된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어떻게 인간, 자연, 우주의 아름다운 진화를 선도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