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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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비의 음료⑤ 커피 플랜테이션/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이슬람에서는 ‘커피를 마신 자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커피는 중요한 종교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국외로 수출하는 모든 커피는 커피 열매를 익히거나 말려 가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원천적으로 커피나무가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선물로 받은 커피나무를 궁정에 심었다. 한편 탐험가들은 신세계에서 발견한 식물을 가져와 옮겨 심는 것도 탐험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커피에 있어서 전설적인 인물 프랑스인 가브리엘 드클리외는 왕의 주치의와 여인의 도움으로 세 그루의 커피나무를 몰래 가져와 앤틸리스제도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커피나무를 운송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자 자기가 먹을 식수를 커피나무에 주면서 천신만고 끝에 마르티니크에 커피나무를 심게 되었다. 몇 년 후 커피콩을 수확하면서부터 많은 양의 커피를 수출했다.
파리의 지식인들이 마시는 품질 좋은 커피를 다량 생산하게 된 것은 1740년 이후였다. 이 커피나무 묘목은 멕시코와 산토도밍고의 농원으로 이식되어 주변으로 퍼져나갔으며 프랑스는 세계 제일의 커피 생산지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왕은 필요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가증을 남발하여 파리의 카페는 600여 곳에 이른다. 커피는 파리 사람들을 카페라는 공공의 장소로 모여들게 했으며, 자유로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생각을 토론하는 대화의 장을 열게 했다.
루소,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자들과 선각자들은 카페에서 매일 커피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의 대화는 카페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을 끌었으며 사회를 계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카페는 다양한 정보와 관심거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지금의 인터넷과 미디어의 역할처럼 유행이나 정보의 진원지가 되었다.
정부는 카페를 감시하여 선동자들을 체포하기도 했지만 카페를 폐쇄하지는 않았다. 이는 재정상태가 나빠진 정부로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해결보다는 재정 확충에만 신경을 쓴 탓이다.
결국 카페 드 포이에서 젊은 법률가인 카미유 데뮬랭은 왕정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도록 선동하게 된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반란군은 커피 농원에 불을 질러 섬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커피 생산국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부의 원천인 커피의 생산지 산토도밍고에서 철수를 해야 했고 이는 가장 큰 손실이었다. 유럽의 커피는 앤틸리스제도에서 자바로 넘어갔다.
한편 많은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던 네덜란드는 영토 확장이나 종교적인 정복보다는 상업적 이익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자바에서 커피 플랜테이션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커피농사를 지어 농장에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커피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절하기위해 수확한 커피를 버리거나 창고에 쌓아 두었다.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커피 소비국의 2/3정도를 공급하게 되면서 실제적인 커피가격을 주도하는 등 타고난 상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작된 자유에 대한 외침, 즉 프랑스혁명은 결과적으로 커피를 즐기던 사람들에게 값비싼 커피를 마셔야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됐다.
2006-08-26 오전 10: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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