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오고 가지 않는다
한문은, 특히 경전 계통의 한자는 과장하자면 한 글자도 허투루 박힌 적이 없다. 그 시절엔 이름자 한 글자 잘못 불렀다고 살인을 부르고, 책 한권 찍는데 집 한 채 값은 족히 들었다. 내가 보는 <금강경오가해> 목판본만 해도, 상권과 하권 각각의 뒤편에, 기부와 소임을 맡은 스님, 거사, 여인들의 이름이 수십명이 박혀 있다.
혜능 <구결>에 잘못된 글자가
지난 시간에 읽은 다음 육조의 원문에서 혹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 六祖: 斯陀含者梵語, 唐言一往來, 捨三界結縛. 三界結盡, 故名斯陀含. 斯陀含名一往來, 行從天上 到人間生, 從人間死 生天上, 竟出生死, 三界業盡, 名斯陀含果. 大乘斯陀含者, 目睹諸境, 心有一生一滅, 無第二生滅, 故名一往來. 前念起妄, 後念卽止, 前念有著, 後念卽離, 實無往來, 故曰斯陀含也.
그곳은 “斯陀含名一往來, 行從天上 到人間生, 從人間死 生天上, 竟出生死,” 안의 행(行)자이다. 종(從)에서 도(到)는 현대중국어도 마찬가지로, “-에서 -에로”라는 뜻이고 생(生)이 거기 동사를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행(行)자는 도무지 어색한 자리에 끼어있다 싶었지만, 전체 문장의 의미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다 해서 대충 지나갔었다.
며칠 전 정책 보고서 쓰다가 흐릿해진(?) 머리로 목판본 <금강경오가해>를 우연히 들추다가 문득 마주친 곳이 있다. 책 끝에 편찬자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 화상이 몇 군데 고증한 노트부분이었는데, 그는 여기 행(行)자가 자(者)자의 잘못표기인 듯하다고 적어놓았다.
나는 즉각 무릎을 쳤다. “어째 그걸 못 보았을꼬. 아직 멀었네….” 틀림없이 본래 원문은 “斯陀含名一往來者, 從天上 到人間生, 從人間死 生天上, 竟出生死”였다. 여기 자(者)는 “-라는 것”이라는 의미로, 개념이나 문장을 한 단위로 뭉뚱그리는 역할을 한다. “사다함을 일왕래라고 이름하는 것은” 이란 뜻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절을 이끄는 that의 위상에 해당한다. that도 ‘그것’을 가리키고, 자(者)도 ‘것’, ‘놈’이니 같은 사유의 패턴을 갖고 있어 흥미롭다.
처음 접하면 한문은 뜯어 읽기 바쁘다. 조금 익숙해지면, 틀린 글자라고 우기게 되며, 조금 더 익숙해지면, 한 글자에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뒷통수를 긁는다. 지금 말이지만 한자 옥편에 의지해서는 한문을 읽고 번역할 수 없다! 다양한 용례에, 때로 상상도 못한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 지점을 한 발 지나면, “정말 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고, 그게 좀 더 지나면 틀린 곳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실제 필사의 과정에서 혹은 목판을 새기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확실히 빠지거나 비슷한 글자로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을 본격 다루는 것이 판본학이다.
함허는 이와 함께, 혜능의 사다함 해설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혜능은 지금 보듯 사다함이 ‘천상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에서 천상으로’ 간다고 썼는데, 함허는 규봉 등의 예를 참고하여 ‘인간에서 천상으로…. 그리고 천상에서 인간으로’가 옳다고 적었다. 해탈 성불이 인간에서만 훌쩍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면, 함허의 지적이 옳다. 인도 문맥은 살펴보지 않았는데, 혹시 천상이 인간보다 완전하고 행복하니 거기서 해탈성불의 계단을 밟고 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혜능의 설이 그럴 듯하다.
보려는 의지가 눈을 만들었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혜능은 사다함을 독특하게 해석해 둔 바 있다. 번역 전문을 다시 싣는다.
- “사다함은 중국어로 일왕래(一往來)로 번역하는데, 삼계의 결박을 벗어던진 자를 가리킨다. 그는 ‘한 번 더 왔다 간다.’ 그는 천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인간세를 다하면 다시 천상에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생사를 졸업하는 사람이다. 사다함의 경지에서 삼계의 업은 그만 다 소멸된다. (이것은 소승이 말하는 사다함이고,) 대승의 사다함은 또 좀 다르다. 눈이 사물을 볼 때, 마음은 동했다가 사라진다. 한번 동했다 사라지되, 더 이상 2차적 동함은 없는 것, 그것을 일러 대승의 ‘한번 오고 감’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상념 하나가 망령되어 일어나더라도 다음 생각이 문득 그치고, 정념 하나가 집착에 빠지더라도 다음 생각이 그 열기를 문득 떠난다. 여기 더 이상 오간 것이 없다. 이것이 사다함이다.”
<금강경오가해>의 부록에는 탁월한 글 몇 편이 실려 있다. 거기 혜능이 <구결>의 총론, 혹은 원론도 함께 있는데, 그 첫머리에, 혜능은 삶의 윤회에 대해, 그 추동의 메카니즘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핵심은 의지이다. 그 의지로 하여 인간이 다음 생의 몸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 설은 우리가 익히 듣던 바이지만, 상식 합리적으로는 좀 낯설다. 한데 쇼펜하우어도 꼭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신체 기관이 의지(will)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그 의지가 눈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이 주장은 불교에서 배워갔는지도 모르겠다.
내 의식의 사다함
소승은 의지가 윤회를 부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삶의 관성을 거슬러오르는(逆流)’ 훈련과 함께 윤회에의 전변도 줄어든다. ‘성스런 흐름에 들어서면(豫流, 入流)’는 욕망과 의지의 장애물과 찌꺼기가 떨어져 나간다. 그와 더불어 그는 꼭 한번만 여기 왔다가, 더 이상은 오지 않았다가, 마침내 더 이상은 윤회하지 않는 대 해탈의 경지를 얻는다. 혜능은 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심리적 과정으로 번안했다. 그것이 대승의 사과(四果)이다. 수다원은 사물에 추동되어 욕망을 내고 분별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인생에 대한 반성이다. “나는 주인공이다. 바깥에 끌려 다닐 한심한 인생이 아닌 것이다.”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자기망각 상태에서의 분출하는 반응이 줄어들면, 그의 의식은 점차 고요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도 불쑥 불쑥 참을 수 없거나, 혹은 이전의 관성들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번 추동된 것은 그러나 “아차, 이게 아니지”하는 자각과 함께 더 이상의 증폭과 반복을 멈춘다. 혜능은 지금 이것을 사다함이라 부르고 있다. “눈이 사물을 볼 때, 마음은 동했다가 사라진다. 한번 동했다 사라지되, 더 이상 2차적 동함은 없는 것, 그것을 일러 대승의 ‘한번 오고 감’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상념 하나가 망령되어 일어나더라도 다음 생각이 문득 그치고, 정념 하나가 집착에 빠지더라도 다음 생각이 그 열기를 문득 떠난다. 여기 더 이상 오간 것이 없다.”
아나함은 그 훈련이 익숙해지고 심화되면서, 타자적 의식과 정념의 물거품이 더 이상 일지 않게 된 경지이다. 혜능은 이를, “욕망과 습기(習氣)가 영원히 제거된, 그리하여 다시는 이 욕계의 삶을 받지 않게 된 사람”이라고 썼다.
그 끝에서 그는 사물과도 자신과 더 이상 다투지 않는 완정한 부동(不動)의 지위를 얻는다.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더 이상 끊어야할 번뇌도 없고(無煩惱可斷), 떠나고 버려야할 탐욕과 분노도 없고(無貪嗔可離), 사물에 대해 좋고 싫은 것도 없고(情無違順), 자극과 반응이 함께 탈각한(心境俱空). 그리하여 안과 밖이 두루 고요 평안한(內外常寂) 사람”이 아라한이다. 여기 유의할 것이 하나 있다. 그가 만일 스스로 아라한의 과실을 성취했다는 자부와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정의(定義) 상, 아라한의 지위에서 범부로 곧바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