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을 위해 살아가는 보살은 중생이 모두 성불할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마음은 지극한 자비심이 드러난 것으로써 보살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깨달음이 완성되었다면 이 세상 중생이 모두 제도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공성(空性)이니, 텅 빈 성품 속에 따로 제도할 수 있는 중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가귀감> 36장에서는 말한다.
菩薩이 度衆生入滅度나, 又實無衆生得滅度니라.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나 실로 멸도할 수 있는 중생은 없느니라.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이다. 보리(菩提)는 ‘깨달음’이나 ‘지혜’ ‘도(道)’라는 뜻을 갖고 있고, 살타(薩 )는 ‘중생’ 또는 ‘유정(有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보살을 각유정(覺有情) 대각유정(大覺有情) 도심중생(道心衆生)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위로는 밝은 지혜로 부처님의 세상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따뜻한 자비로 모든 중생을 보살피며, 온갖 보살행을 완성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수행자를 말한다. 밝은 지혜로 부처님의 세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수행이고, 따뜻한 자비로 모든 중생을 보살핀다는 것은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보살행이며, 보살이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과 보살행이 완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살의 삶은 자신의 수행에만 치중하여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삶보다 더 뛰어나다고 본다. 보살 가운데 아주 공부를 잘하는 큰 보살한테는 ‘마하살(摩訶薩)’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거나 ‘마하살타’ ‘보살마하살’ ‘보리살타마하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마하’의 뜻은 ‘크다’이다.
“보살이 실로 멸도 할 수 있는 중생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멸도(滅度)란 열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활활 타오르던 번뇌가 다 연소되어 사그라진 상태이니, 부처님 마음이 드러나 더 이상 없앨 번뇌가 없다. 더 이상 없앨 번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다른 말로 제도할 중생이 다 사라진 것이다. 깨달음이 완성되어 깨달음을 추구하는 ‘나’와 없앨 ‘번뇌’가 사라진 이 자리에서는 추구할 깨달음이나 제도할 중생조차 없는 것이다.
육조 스님도 <육조단경>에서 ‘네 가지 큰 서원’인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설명하면서 중생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생들을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즉 보살이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다 제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말한 중생들은 모두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지 다른 보살이나 부처가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생이란 마음속에 있는 중생으로서 어리석고 삿된 마음, 허망하고 황당한 마음, 착하지 않은 마음, 질투하는 마음, 독하고 악한 마음, 이런 마음 모두를 함께 말한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성품에서 스스로 이 마음들을 제도해야 ‘참으로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하니, 무엇이 “자신의 성품에서 스스로 이 마음들을 제도한다”는 것인가? 이는 자기 마음 가운데에 있는 삿된 소견과 번뇌, 어리석은 중생들을 바른 견해로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바른 견해가 있다면 반야지혜로써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우쳐야 한다. 저마다 스스로 제도하되 삿된 것이 오면 바른 것으로 제도하고 미혹한 경계가 오면 깨우침으로 제도하며, 어리석은 경계가 오면 슬기로움으로 제도하고 악한 것이 오면 착한 것으로 제도하는 것을 ‘참으로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서산 스님이 하신 말씀과도 그 뜻이 통한다.
菩薩 只以念念 爲衆生也 了念體空者 度衆生也. 念旣空寂者 實無衆生得滅度也.
보살은 오직 자신의 생각 하나하나를 중생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바탕 그 자체가 텅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다. 생각이 텅 비어 고요한 마음이라면 실로 멸도할 수 있는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선가귀감 언해본> 주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성품에 있는 중생을 밝힌 것이다. 마음은 본디 적멸(寂滅)이므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중생과 부처 또한 그 모습이 적멸이다. 마음의 작용에 이르러서는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계(戒)이며, 마음에 혼란이 없는 것이 정(定)이며,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지혜이다. 마음에 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지(止)이고 앎이 어둡지 않은 것이 관(觀)이며, 편한 마음으로 이치를 잘 아는 것이 인욕이고 마음에 이런 모습이 끊어짐이 없는 것이 정진이다”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부처요 어리석은 사람은 중생이며 자비로운 보살은 중생들을 제도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모든 법을 깨달아 통달하는 것이며 원력은 보살행을 쉼없이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자신의 마음자리에서 해나가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