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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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한퇴지/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강릉 선교장은 전통양반가옥의 백미이다. 설악성지나 낙산사를 갔다가 여유가 허락되면 저절로 들르게 된다. 절집의 화려함과 분주함과는 달리 선비집의 단아함과 고요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집의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에서 나온 당호이다. 이 집안 출신 후손이 출판사를 차려 ‘열화당’이란 상호를 사용하여 좋은 책을 많이 낸 까닭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입구의 활래정(活來亭)은 연지를 바라보고 있는 누각이다. 칠월칠석을 전후해 연꽃이 만개한다. 정자로 들어가는 대문 양쪽 기둥에는 낯익은 한문주련이 달려있다.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새는 연못가의 숲으로 자러오고
스님네는 달빛아래 문을 두드린다.

해질 무렵을 묘사한 이 시는 당나라 가도(賈島 779~843)의 솜씨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이 유명해진 것은 ‘작품성’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는 한 때 무본(無本)이라는 법명으로 출가생활을 했다. 어느 날 석양 무렵 시를 한편 완성해놓고 윗구절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된다. ‘승고월하문’에서 ‘두드릴 고(敲)’자를 ‘밀칠 퇴(推)’로 바꿀까 말까를 고민했다. ‘문을 두드린다’가 좋을까 ‘문을 밀친다’ 가 좋을까 하며 나름대로 꿰맞추고 있던 중 경윤(京尹 지금의 서울시장격)의 행차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삼매 속에서 오로지 “퇴?…고?…퇴?…고?…퇴?…”를 송화두(頌話頭) 마냥 읊조리다가 행차 가운데 끼이고 말았다.
이 뜻하지 않는 돌출적인 사건 앞에 수행원들이 난리가 나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마침내 경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퇴(推)자보다는 고(敲)자가 낫겠다고 하여 그 의심을 해결해준다. 그가 바로 한퇴지(韓退之 768~824)이다. 이후 글을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부르게 되었다.
819년 헌종황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궁중으로 가져와 사흘동안 모셨는데, 퇴지 한유(韓愈)는 “오랑캐의 사람인 불(佛)의 메마른 뼈를 궁중에 들임은 부당하며, 이를 수화(水火)로 소멸시켜 단절하소서”라는 내용의〈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 이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조주(潮州)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 태전보통(太顚寶通) 선사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도 기생 홍련을 선사에게 보내 꼬시도록 했으나 실패한 뒤 한퇴지는 이미 기싸움에 밀려있는 상태였다.
선사는 만나자마자 ‘불교의 어떤 경전을 보았느냐’고 쏘았다. ‘별로 뚜렷하게 본 경전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불법을 비방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러자 한퇴지는 어물어물 하였다.
“만약 시킴을 받아서 했다면 주인이 시켜 따라하는 개(犬)와 다를 바 없고, 자신이 스스로 했다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서 비방한 것이니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한 마디에 그의 뒤틀림이 스스르 풀렸다. 이제 조사(祖師)의 도리를 전할 시절이 왔다.
어느 날 한유가 선사를 찾아왔다.
“산구경을 왔는가? 나를 보려 왔는가?”
“산구경을 왔습니다.”
“그럼 지팡이를 가지고 왔는가?”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태전선사가 말했다.
“지팡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말짱 헛일이다.”
“??? (이게 뭔 소리여?)”
ㅋㅋ, 아마 평생화두가 되었을 것이다.
2006-08-26 오전 10: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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