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인류는 힘겨운 싸움을 했다. 현대사는 우리 인류가 더 큰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다고 하니 우리는 누구와 싸운 것이고, 우리에게서 지고한 가치들을 앗아가려고 했던 그 악마는 과연 누구였든가.
지긋지긋한 싸움의 와중에서 우리는 싸움의 어느 한 쪽 편에 서기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본주의 아니면 사회주의라는 잣대로 우리는 세상을 분별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나뉘어졌고, 소위 생각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자, 사회주의자로 자기 자신을 자리 매김해야만 했다. 지난 세기 말까지만 해도 한 쪽 눈금의 끝은 자본주의이고, 또 다른 한 쪽 끝은 사회주의인 잣대를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그럭저럭 제대로 볼 수 있었고,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 소련을 비롯해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이후 그 잣대로는 더 이상 이 세상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민족과 국가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갈등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을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나누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기가 불가능해졌다.
새뮤얼 헌팅턴은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지구촌의 수많은 충돌의 원인을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도 미흡하다. 문명이 다르다는 것이 왜 충돌을 가져와야만 하는가. 다르면 꼭 충돌해야 하는가. 다르면 더 좋아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종교가 다르다는 것,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 충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이든가. 이타(利他)이다. 남[他]을 이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삼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대승의 정신은 자신의 해탈만을 목표로 삼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 모든 중생과 함께 성불할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겠다는 정신이다. 사람들은 타인도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진다. 대승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잣대로 보면 세상이 더 잘 보인다.
지난 세기에 지구촌을 휩쓸었던 전쟁의 광기도 어쩌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나라만을 사랑했던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의 수준 낮은 다툼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은 뒤에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개인과 나라가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
지구촌이 평화로워지고,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승인(大乘人)이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나와 우리만이 아니라 타인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실망스럽게도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 사회를 나누고 있다. 틀린 잣대로 세상을 재고 그 수치로 사회를 이끌고자 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지난 세기에 우리가 싸웠던 악마는 나와 우리만을 생각하는 에고이스트였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우리 마음속의 에고이스트를 물리칠 때 가능하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아직도 자신을 자본주의 신봉자, 혹은 사회주의 신봉자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어두울 수밖에 없다.
새로운 잣대로 세상을 보자. 21세기의 지도자는 자본주의 신봉자나 사회주의 신봉자가 아니라 대승인이어야 하고, 보다 많은 대승인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