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다 내던져 버리고 편안하게 사세요!
진리에 순응하면서 넓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자식을 올바르게 이끌려면


자식이 너무 속을 썩이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길로 이끌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청개구리가 따로 없이 그렇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기에 제가 열심히 살아서 부모에게는 효도를 해야 하고 자식들은 남부럽지 않게 길러서 내보내야 하는데 ‘사는 게 뭔가? 내가 왜 자식에게 내 자신의 삶을 저버리고 이렇듯 희생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살기가 싫어집니다. 스님께서는 원수지간에도 부모와 자식으로 만날 수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인연의 부모는 어떻게 자식을 이끌어 줘야 하나요?

애착을 두지 말라는 겁니다. 또 부모한테도 그렇게 애착을 두지 말고 효도를 해라 이겁니다. 자식이나 부모나 남이나 똑같이, 남한테 이익하게 하고, 겸손할 줄 알고, 고개 숙일 줄 알고, 마음으로써 말입니다. 항상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이렇게 살면 누구한테나 인과응보라는 그 소리조차 없을 것이고 또는 자식과 부모지간에 다시 만난다 할지라도 금끼리 만나고 이렇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내가 고생을 하고, 이렇게 받아야 하고, 이렇게 아파야 하나 이러지만 그것이 애당초부터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서로가 서로의 인연에 따라서, 인과응보에 따라서 만났기 때문에, 그 고통을 면치 못하고 애를 쓰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대로 우리가 지금 살아 있을 때 이 도리를 알고 배워야, 죽어서도 지금 살아 있는 그 애착과 모든 걸 다 몰락 버리고서 애착을 두지 말고, 욕심도 두지 말고, 내가 한생각 전부 놨을 때 비로소 죽어도 그것은 시공이 없는 그 대공의 한자리를 할 수 있다 이 소리예요, 끄달리지 않고. 그러니 우리가 윤회에 말리는 것도 억겁을 거쳐서 말리지만, 우리가 한생각 돌려서 이 도리를 몰락 놔 버리고 안다면 또 말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어요.
내가 예전에 산으로 돌아다니다 보니까 빨치산으로 붙들렸거든요.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조회를 했던지 인제 어머니가 찾아온 거예요, 산으로. 찾아왔는데 보니깐,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참 그 마음은 어디다가 다 할 수가 없지만, 어머니한테 이런 말을 한 예가 있어요. 내가 사람 같지도 않으니까 어머니가 그 자리에 펄떡 주저앉으시면서 그때 그만 사람이 못쓰게 돼 버렸던 모양이에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렇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난 또 그렇게 됐는지 어떤지 아랑곳없이 거기에서 그냥 “어머니! 어머니의 진짜 자식이라면 다시 요다음에 내가 사람이 돼서 올 것이고 진짜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면, 사람이 못된다면, 다시는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애착을 떼 버리시고 죽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하고 떠났거든요.
떠날 때 어머니가 좋은 옷을 두 벌을 가지고 오셨는데, 이 바지가 다 떨어지고 그러긴 했지만 그 몸에다가 그 옷을 걸치면 뭐합니까? 아니, 그 말도 못하게 찢어지고 피가 나고 딱정이가 앉고 사람 같지도 않은데다가 그 옷을 입으면 뭘 합니까. 그래서 가다가 그 좋은 옷은 딴 사람 주고 이러고는 한 산모퉁이로 돌아섰을 때 가랑잎이 자욱자욱 밟히더라고요. 그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나를 울렸죠. 그때에 나는 무슨 노래를 혼자 부르고 갔느냐 하면 ‘어머님의 손을 놓고….’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그 산모퉁이를 돌아섰어요.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지면서, 이렇게 덧없는 인간의, 이 모습의 그림자를 보시고 저렇게 쓰러지셨으니, 이것마저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이렇게 보이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잔인무도하고, 그래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었어요. 하지만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런 예가 있듯이, 진짜 자식이라면 금과 금이 마주 있을 때에 금은 둘이 아닌 거예요. 금은 금이기 때문이죠. 근데 뭘 애착을 갖고 그럽니까. 다시금 이 세상에 나와서 한 번 또 만났으면 헤어지는 일이 틀림없을 텐데, 그 모습을 말입니다.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만났다 반복하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내 자식이라 하고 무엇을 내 부모라고 하겠나. 그저 내가 뿌린 거니까 내가 해결해야겠으니 착이 없이 그대로 이익하게 해야죠.
아주 못생긴 소나무를 봐도 ‘아이, 너도 나와 같이 못생겼구나. 못생긴 너지만 이 위의 순을 자르면 넌 모가지까지 달아나가니 아이, 너하고 나하고 만난 인연도 인연이니 우리 같이 살아 보자.’ 하고 맨 끝에 밑바닥에 달린 그것을 소나무 가지로 꺾어서, 그 잎을 씹어 가면서, 또는 그 대를 씹어 가면서 물을 마시고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양심이 부끄럽진 않아요. 누구를 해치려고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예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실과나무는, 오늘 저녁에 간다 하더라도 오늘 저녁까지는 심어야 한다, 이런 게 투철합니다. 착이 없으면서 그대로 하는 거죠.
내가 부모고 자식이다 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하고 막아서고 그런다 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인과응보로서 유전성으로서 그건 그대로 과보대로 그냥 가는 거죠. 그러니까 막아서서 안달복달 하지 말라 이거예요. 애를 쓰고 살 필요가 없어요. 괴롭게 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도 괴로울 게 없어요. 이 세상에 살면서 뭐 그렇게 괴로울 게 있습니까? 다 우리가 해 놓고서, 자기 자신들이 해 놓고서 그렇게 된 거니까 인제부터라도 알고 착을 탁 끊어서 놔 버려라 이겁니다. 내 마음의 주처가 있듯이, 그 사람들의 마음의 주처도 엄연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못되게 하진 않아요, 절대로. 그러니까 놔 버려라 이겁니다. 누구든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불이 나 보세요. 어미 애비 생각하고 자식 생각 할 사이가 없어요. 그냥 뛰죠.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살 구녘은 다 찾습니다. 그런데 왜 앨 써야 합니까. 애쓸 필요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만났다가, 짚단을 한데 이렇게 부착을 시켜 놨다가 헤어질 때 되면 홀연히 헤어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근데 왜 애를 써요? 언제 적엔 부모 자식이고, 언제 적엔 부부였고, 언제 적엔 한식구였어요? 깻벌레가 원수 갚느라고 태어난 것, 그것도 인과응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말로는 할 수가 없어요.
같이 있으면서 홀로 있고 같이 있으면서 홀로 있고. 그것이 스스로 자기가 느끼고 스스로 알아야 하는 거죠.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던지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어요. 이게 자식 부모다. 부모가 “넌 요리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랬다 하는데 자식은 “난 이리로 가는 게 좋겠소.” 그럴 때에 이 부모가 생각할 때는 ‘이리로 가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겁니다. 그럴 때에 자식은 부득이 이리로 가겠대요. 예를 들어 얘기예요. 그러면 ‘아! 글로 가는 것이 네가 옳다. 그리로 간다 할지라도 네가 너를 위해서, 항상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니까, 가는 대로 길을 네가 찾아 가면 되니까.’ 하면 되지 뭐 애쓸 필요 없어요. 하나도 애쓸 필요가 없어요. 떨어졌다 붙었다 이래도 애쓸 필요가 없어요. 언젠가는 저를 찾아 저가 가게 돼 있어요. 뒷받침이나 해 주고, 부처님께서도 그 뒷받침을 그렇게 해 주고 원하는 자에게 마다 안 하시고 중생들에게 해 줬죠. 지금까지도 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이상 부처님은 항시 살아 계십니다. 꽉 차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입니다. 여여하게 말입니다. 그러니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거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냥 홀로예요. 항상 홀로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있고 항상 같이 있으면서도 홀로 있고 말입니다. 에너지라고 한다면 그냥 같이 돌고 있기 때문에, 내던져도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내던지면 오히려 살게 돼 있고, 내던지지 않는다면 육(肉)만 붙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안되죠. 그러니 다 내던져 버리고 편안하게 사세요.

약을 먹고 치료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에다 다 돌려놓고 생활을 하는데요, 예를 들어서 어떤 병에 걸렸을 때 거기 해당되는 인간 법이 있을 경우에는 인간 법도 따라야 되는지, 아니면 자기 주인공에다 일체 맡겨 놓고서 거기 따라가야 되는지 그걸 알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 법이라고 한다면 몸이 아플 때 약을 먹으면서 그걸 주인공에다 치료를 같이 해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거를 다 거기다 맡겨 놓고 여여하게 걸어가야 되는지요.

그것은 이런 게 있죠. 모든 게 한계가 있듯이 아마도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럴 거예요. 많은 사람을 접해 보니까요, 어떤 사람은 보약 하나도 안 먹고 자기가 아예 생각에서 그냥 보약을 먹고 있습디다. 자기가 생각해서 ‘아, 다 그냥 거기서밖에는 할 수 없지. 거기서 기운을 내게 해야지, 응? 기를 넣고 피가 좋게 해야지.’ 이렇게 해서 보약도 다 그냥 부처님한테 자기 성의대로 갖다 놓고는 자기들이 해요. 그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약을 먹으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약을 아주 끊고선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그러니깐 그거는 자유예요. 근기에 따라서 그것이 되는 거지, 근기가 하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거는 이렇다 저렇다 할 수가 없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고정됨이 없어요.
그러니깐 여러분의 마음대로, 자유대로 하세요. 편리하게 그렇게 하시려면 하시고, 진짜 우리가 공부를 해야지 하는 문제가 있다면 좀 너그럽고 여유 있게 뭐, 이런 것 병으로 인해서 먹는 약이 아니라 나이가 먹으면 이러한 피로회복제도 좀, 간장약이 피로회복제라고 합디다만, 그런 것을 좀 먹으면 좋겠다 할 때는 그냥 잡수셔도 좋고요. 거기에도 걸리지 말아야 되겠죠. 또 병원에 갈 일이라면 병원에 가는 것도 참선이고 그것도 법이니까요. 그런데 병원에 가서도 이것이 외려 해가 될 병이라면 차라리 안 가는 것만 못하죠.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글쎄 어떤 사람이 이 넓적다리에 부스럼이 났었답니다. 그런데 병원엘 가서 진찰을 했는데 그것을 악성이라고 하면서 수술을 하고는 이렇게 잘라내고 도려내고는 방사선을 쪼였던 모양입니다. 근데 그런 데다가 방사선을 쪼여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답니다.
그런데 방사선을 쪼여 가지고 이게 그냥 이 다리 하나가 이렇게 부어올랐습니다. 그렇게 돼 가지고 울고불고 하면서 그 남자를 이렇게 들고 들어왔는데요, 보니까 너무 착하고 너무 선량하고 너무 참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래서 “그러면 병원에서 퇴원시켜라. 퇴원시켜 가지고 좀 있다가 다시금 한 번 다른 데로 가서 진찰을 해 봐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방사선 쬐는 데서 끌어냈죠, 그러니까. 끌어내 가지고선 얼마를 있다가 인제 그 안에 모든 것이 좀 유해지고 물렁물렁해지고 그럴 쯤에 “야, 병원으로 가라, 인제. 아주 딴 병원에,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해 봐라.” 이렇게 했습니다. 가서 병원에서 진찰을 하니까 이건 방사선 쬐지 않을 것을 쬈다 이겁니다. 쬐어 가지고는 이게 살이 굳어져 가지고 도대체 마비가 되고 여기가 이렇게 자꾸 부어오르는 거예요, 살이. 그러니까 그 병원에서 인제 다시 수술을 하고 방사선 기를 없애면서 두 번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것이 없고 인제 아물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스님이 그렇게 나오란 말을 안 하셨으면 얘는 죽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울면서 고맙다고 전화가 왔더군요. 그러니까 우리가 갈 일에는 가야 하지만 안 갈 일에는 안 가야 합니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벌써 가야 할 건지 안 가야 할 건지 자기가 먼저 압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공부를 안 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기독교다 가톨릭이다 이런 걸 떠나서입니다. 부처님은 당시에 이런 공부를 그냥 실상 속에서 실현을 하게끔 참선을 가르치시고 마음을, 병을 고쳐 주셨지, 무슨 육신을 고쳐 주거나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의 병만 고친다면 육신의 병은 여러분이 자유자재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불사선이고 불사악이라면?


불자로서 보시도 해야 하고 착한 일을 해야 하는데 ‘불사선 불사악’ 이라는 것을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선도 생각을 안 하고 악도 생각을 안 하고 그러면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보라는 생각이 나오는 것도 놓으세요. 이거 보세요, 내가 길을 가다 보니까 장님이 말입니다, 장님인데 클럽이 있나 봐요. 그래서 거기 돈이 많이 있으면 눈 뜬 사람이 그걸 가져가고 그 사람을 그렇게 앉혀 놓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그걸 생각 못하고 저거를 안 되겠다 싶어서 가다가 보니깐 ‘에이그, 저도 거지가 누구를 돕는다고 그래?’ 그럴까 봐, 그것도 좀 난 수줍어요, 그렇게. 그래서 얼른 뒤로 돌아가면서 십만 원짜리 하나하고 만 원짜리 다섯 개하고 똘똘 뭉쳐서 손에다 잔뜩 쥐었습니다. 쥐고선 가다가 얼른 그 사람 손을 딱 쥐고 요걸 쥐여 주고선 “15만 원이야!” 그랬습니다. 귀에다 대고 살짝 말하면서 쥐여 주곤 ‘뒤야, 날 살려라.’하고는 부지런히 그냥 길을 걸었습니다.
거기 이유가 뭐가 붙습니까? ‘이런 걸 보시를 해라 안 해라.’ 이런 게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내가 가다가 하고 싶어서 그냥 한 거지, 그것뿐이지 무슨 이유가 거기 붙습니까? 여러분, 변소에 가서 똥 눌 때 이유가 붙습니까? 잘 때도 이유가 붙고 먹을 때도 이유가 붙습니까? 이유 붙지 않습니다. 진짜 배고플 때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밥 턱 갖다 놓고는 그냥 퍼먹습니다. 똥 급할 때 변소 문 열자마자, 무슨 이유가 거기 붙어요? 그냥 뭐 그냥 그냥 들어가서 얼른 풀고 누고 나야 그때 쪼끔 여유가 생기겠죠. 그러니까 그렇게 급할 때 이유 붙지 않듯 참선이라는 것은 그렇다 이 소립니다. 급박할 때 이유 붙지 않듯. 왜 좋은 옷을 입고 가다가요, 요거 흙물 튈까 봐 좀 사리고 그러다가, 요거 앉는 데도 좀 조심해서 앉고 그러다가 나중엔 흙먼지 비가 그냥 막 쏟아져서 만약에 다 맞았다고 할 땐, ‘에라, 이젠 다 맞았다.’ 이럴 땐 조심도 안 되고 물방울 튈까 봐 걱정도 안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 점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공해서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이 생활 속에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며 무엇을 안 했다고 하며 무엇을 더 한다 덜 한다가 있겠습니까. 내가 불쌍한 것 보면 그대로 하는 거고 또는 내가 할 게 없으면 무주상 보시로 마음을 내서 저 사람도 그렇게 잘 살아라 하고 마음을 내 주면 무주상 보시가 되고, 유주상 보시도 그렇게 하고, 아, 양면으로 다 해도 한 사이가 없어요. 이유가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냥 사는 게 참선이라고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그럼 내가 바보인가요?” 그러거든요. 가만히 놓고 가면 뭘 먹고 사느냐 이거예요. 벌이하는 것도 참선이요 못하는 것도 참선이요, 일하는 것도 참선이요 아, 모두 부지런히 뛰는 것도 참선인데, 지금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이게 참선이에요. 아, 지금 세상에 가만히 멍멍이처럼, 바보처럼 가만히 뒷산이나 쳐다보고선 가만히 명상이나 하고 이렇게 앉았으면 그게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마조 스님이 말입니다, 글쎄 딱 가부좌를 틀곤 떡 앉아서 좌선을 한다고 앉아 가지고는 옴쭉도 안 하다가 밥 먹을 때 ‘공양해라’ 이러면 일어나거든요. 오줌 마려우면 일어나고 똥마려우면 일어나고, 그 외에는 안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은사가 가만히 보니까 아주 이거는 큰일 났거든요. 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이 씨가 먹히질 않아요. 그래서 하루는 기왓장을 가지고 그 턱 밑에다가 놓고는 싹싹 갈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마조가 내려다보니까 우리 스님이 참 이상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좌선하다 말고 “스님! 그 뭐 하시려고 기왓장을 그렇게 가십니까?”
여러분이 이 이야기 다 아실 겁니다. “뭐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하니까 ‘아이구, 망령이 들으셔도 이건 뭐 보통 망령이 든 게 아니고 어떻게 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스님! 그게 기왓장을 갈아 가지고 거울이 어떻게 됩니까?” 하니까 “너는 그렇게 틀고 앉아서 부처를 어떻게 이루느냐?”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똥도 누러 일어나지 말고, 선이 끊어질 테니까, 아니 오줌도 누지 말아야 하고 먹지도 말아야 하고 그래야 어떻게 선이 끊어지지 않지, 선이 그냥 하루에도 몇 번씩 끊어지니 어떻게 부처를 이루느냐?” 그러니까 그때서야 무릎을 탁 치고는 “아이구, 그냥 이렇게 이렇게 이렇군요.” 하면서 그때서야 자기 은사한테 삼배를 올리고 “스님, 이것도 참선인 걸 몰랐습니다.” 하더랍니다. ‘참선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를, 이걸 몰랐습니다.’ 하는 거를 말하고선 그때 껄껄 웃고 내려다보면서 한번 울었답니다.
그런 이치가 있듯이, 여러분은 지금도 참선하는 거고 변소간에 앉았어도 참선하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건데 우리가 물질적으로 이렇게 살아나가면서 아주 요렇게 정해놓고 사는 것이 그냥 관념이 돼 가지고, 습이 돼 가지곤 그걸 떼질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선이다 악이다 하는 생각에 매여서 그걸로 모든 걸 판단하려 하지 마시고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의 도리를 알려고 하는 데 항상 뜻을 두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천재지변에 대해서


미국에서는 큰 산불이 나서 엄청난 지역을 불태워 버리더니 우리나라에는 태풍과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홍수와 물난리로 온 산하가 멍들었습니다. 역대 조사 스님께서나 현존해 계시는 부처님께서는 마음 도리로써 협상하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천재지변이나 그러한 사태에 무지한 저희들로서는 어떻게 마음을 내야 될지 스님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진리에 순응하는 일이죠, 그대로. 사람들이 넓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는 게 없으면 가는 게 없듯이, 우리가 그런 것을 불상사라고 하지만 그게 불상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태양열과 즉, 온기라고 합시다. 그 온기가 밑 물 찬 데까지 서로 대치를 해 주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고 또 그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면 위의 것이 못 살고 아래 게 못 삽니다. 그래서 밑의 게 위로 올라오고 위의 게 밑으로 내려가야만 같이 먹고 삽니다. 서로 주고 서로 살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다 더불어 물도 모든 생명들이 있기 때문에 물도 사는 거지, 생명들이 없으면 물도 죽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들이 살아나가는 데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들뿐만 아닙니다. 물에서 사는 거든지 들에서 사는 거든지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산에서 풀을 다 태우는 일들은 그 곤충이나 모든 생명들이 다시 새 뿌리 새 싹이 나와서 다시 먹게 하기 위한 도리도 됩니다. 이 모두가 천연적으로 자연적으로, 그게 자연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어느 누가 잘못해서 불이 났다.’ 이러기보다는 ‘다, 더불어 같이 살기 위해서다.’ 하는 그 말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태풍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데, 그거는 어쩐 일로 그러냐 이러겠죠. 넓게 본다면 그거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외아들을 데려갔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그것도 쓸모가 있기 때문에, 외아들이고 아니고 간에 쓸모가 있기 때문에, 다시 대치해서 다시 내보낼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깐 죽는 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사는 것도 그냥 사는 게 아니에요. 한 치도 이거는 벗어날 수 없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자동적으로 자유스럽게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공기주머니를 한 발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반면에 모든 걸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공부하는 이치는 그런 것을 다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큰 그릇이 되라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대치를 다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실감나는 얘기 한마디 할 테니 들어 보세요. 내가 그전에 산으로 들로 돌아다닐 때 얘깁니다. 장마 질 때가 거의 됐다 해도 어느 순간에 장마가 닥쳐올는지를 인간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논두렁을 지나다 보니까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어요. 그 물을 떠서 논에도 주고 그러는 모양입디다. 그런데 뭐, 날이 궂거나 그렇지도 않았는데 큰 개구리가 뒷다리에다가 뭘 걸고선 질질질질 끌고 올라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선 자세히 보니까 알 있지요? 개구리 알! 그걸 떠내려갈까 봐 풀숲에다 끌어다 놓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 물에서부터 질질질질 끌고는 우거진 풀숲에다 갖다가 놓거나, 제 자식을 업어다가 풀잎 위나 나뭇가지 위에 갖다 놓고 그러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어떡하나 볼 양으로 거기에 또 가고 또 가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더니 그 이튿날이 되니까 그 작업을 다 했어요. 그 기다란 알집을 그냥 다 끌고 간 거예요. 그런데 그 이튿날 보니까 웬걸, 날이 궂기 시작하더니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치면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데, 말도 못해요.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어떻습니까?
그렇게 알까지 살리기 위해서 태풍 전에 미리 피난시키는 그런 개구리도 있는데, 여러분은 거듭거듭 진화가 돼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재권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만 자식을 위해 뿌리에 밑거름을 줄 수 있고 또 그 뿌리의 밑거름이 부모 조상들한테까지 가서 묵은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부모에게 효도를 못해서 가슴이 아프다든가, 또 늙어 가면서 생각을 해 보니까 부모한테 효도만이 아니라 뭐 하나 한 게 없다면 그것이 바로 묵은 빚입니다. 나도 묵은 빚 때문에 많이 울었죠. 개구리도 다음 날 장마가 올 것을 알고 있는데 인간이 그만 못해서야 되겠느냐 이 소립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농사지어 보셨으니까 아시겠죠? 옥수수나 수수도 올해는, 즉 몇 개월만 있으면 태풍이 심하게 불어서 온전히 서 있을 수가 없겠다 할 때는 뿌리를 넓게 잡아요. 그래서 옥수수가 뿌리를 넓게 잡은 걸 보고 올해 태풍이 얼마만큼 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 그런 미물들도 미리 대비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지각까지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지견이 풍부한 인간이 어떻게 기복으로만 나가면서 도깨비장난을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이 살아서 귀신 짓을 하면 죽어서도 귀신밖엔 못 돼요. 그런 습만 남았기 때문에요. 그러면 또 자기만 귀신이 됐으면 좋겠는데 자식들더러 귀신 노릇 하라고, 귀신 노릇 안 하면 안 되게끔 그냥 자꾸 산 자식들을 못 견디게 굴어요. 그러니 그게 부모입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살아서 귀신 짓을 하지 말아야 죽어서도 귀신이 안 되고 선신이 돼서 자식들을 돌볼 수 있고 자기가 낳은 것을 자기가 거둘 수 있는 거죠. 자기가 뿌린 거 자기가 거둬야 되죠? 그런데 자기가 뿌리고도 자기가 거두지 못하는 현상들이 모두 생기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자기가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가 자기를 몰라라 합니까?
그러니 우리 오늘부터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픔도 둘 아니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면 저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도 전부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일 거예요.
2006-08-21 오전 11:44:09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