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부처님의 마음을 열반이라 생각하고 중생의 마음을 생사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 처지에서 맞는 소리다. 따라서 생사속에 있는 중생이 부처님의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수준에 맞추어서 단계적으로 공부하는 일은 당연하다. 중생의 이런 처지를 부처님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선가귀감> 35장에서는 말한다.
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死涅槃 如見空花起滅.
중생이 생멸이 없는 데서 헛되이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의 꽃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무생(無生)은 무생멸(無生滅)이니 시비분별로써 생멸하는 중생의 마음이 없는 곳을 말한다. 언제나 변함없이 여여하여 텅 빈 충만으로서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 부처님 세상이요 깨달음이다. 생사(生死)는 윤회라는 뜻을 갖고 있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업 때문에 지옥 아귀 축생의 몸으로 끊임없이 바뀌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중생의 생사는 바깥 경계에 집착하여 시비 분별하는 마음일 뿐이다. 시비 분별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질 법에 집착할 마음이 없게 되니 이것이 열반이다.
중생이 보는 생사와 열반은 차원이 다르지만, 부처님의 지혜로 보면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이다.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다. 중생계로 벌어지는 생사로서 온갖 연기법이 알고 보면 실체 없는 텅 빈 성품에서 나왔고, 이 텅 빈 성품에 많은 인연이 주어지면 온갖 법이 드러날 뿐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그 근본에서는 모든 법이 공(空)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空) 자체에서 주어진 인연으로 온갖 모습이 다양하게 드러나니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법의 진실을 알고 색(色)에도 걸리지 않고 공(空)에도 걸리지 않는 이 자유자재한 부처의 지혜를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는 밝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분별이 없다. 어떤 인연이 오면 그냥 그 모습을 드러내나 그 인연이 사라지면 그 모습도 사라진다. 따라서 중도에서 볼 때는 일방적인 생사나 열반은 허공의 꽃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허공의 꽃을 보는 것은 눈병이 났을 때니, 존재하지 않는 생사와 열반을 본다는 것은 중생이란 병이 있을 때다. 시비 분별이란 병이 다 떨어진 부처님의 지혜에서는 생사나 열반이란 분별이 없다. 이것이 중도다.
이 사상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중론>의 삼제게(三諦偈)이다. 공(空)·가( )·중(中) 세 글자로 인도 불교의 중도사상을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성립된 삼론종은 물론 천태종과 화엄종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空)은 열반이고, 가( )는 인연이 모여 임시방편으로 있게 되는 생사이며, 중도는 생사와 열반을 뛰어넘어 있는 ‘참성품’을 말한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 名 亦是中道義.
온갖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공(空)이라 말하고 또한 가명( 名)이라고도 하며 중도의 뜻이라고도 하느니라.
‘온갖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란 인연이 모여 생겨나는 모든 연기법을 말한다. 이 연기법의 실체를 찾아보면 많은 인연이 모여 생겨났을 뿐, 본디 성품이 없으므로 ‘공’이다. 아주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분명히 어떤 인연이 모여 일어나는 법이 있다. 이 법은 모인 인연이 흩어지면 곧 사라질 법이므로 ‘임시로 거짓 존재’한다는 의미로써 ‘가( )’라는 표현을 쓴다. 인연이 모여 어떤 법으로 나타나면서도 공이고 공이면서 인연이 모여 어떤 법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면서 동시에 공이고 가가 되니, 이것이 중도이다. 곧 공이 가이면서 중이고, 가가 공이면서 중이며, 중이 공이면서 가가 된다. 따라서 모든 연기법의 내용은 공, 가, 중으로써 서로 내포되어 분리되지를 않으니 즉공(卽空) 즉가(卽 ) 즉중(卽中)이 된다. 여기서 즉(卽)은 공과 가와 중이 한 곳에 함께 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이것이 유명한 삼제원융(三諦圓融) 사상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性本無生故 無生涅也 空本無花故 無起滅也, 見生死者 如見空花起也 見涅槃者 如見空花滅也. 然起本無起 滅本無滅 於此二見 不用窮詰, 是故 思益經云 諸佛出世 非爲度衆生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
참성품에는 본디 생멸이 없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이 없고, 허공에는 본디 꽃이 없기 때문에 꽃이 생겨나거나 없어질 것이 없다. 생사를 본다는 것은 허공에 꽃이 생긴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 꽃이 없어진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참성품에는 생겨나도 본디 생겨나는 것이 없고 없어져도 본디 없어지는 것이 없다. 생사와 열반 이 두 가지 견해에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끝까지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익경>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사와 열반 두 가지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바로잡아 주었을 뿐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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