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일 때의 ‘무불론(無佛論)’을 짓고자 할 만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무진거사는 불법을 만난 이후 그 마음 씀씀이는 시원하게 툭 트였다. 더욱이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까지도 평등하게 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배려했다. 거사로서 그리고 관료로서 모든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해 흉년이 크게 들었다. 도교(道敎)의 도사(道士)들까지 그가 불자인줄 알면서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그의 집을 찾아와 양식을 보시해 주도록 부탁했다. 무진거사는 대뜸 그들에게 <금강경> 외울 것을 주문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도 <금강경>을 외워야만 했다. 일부분만 외는 자에게는 쌀 한 말을 주고 전체를 외운 자에게는 석 섬 두 말의 쌀을 시주했다.
만약 여기까지라면 그 역시 아직까지도 또 다른 편협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염불보다는 잿밥으로 승부했다’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시주조건으로 <금강경>을 읽도록 한 것은 반야와의 인연을 맺도록 해주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무진거사가 재물시주와 법시주 두 가지를 했다고 평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흉년이 들었으니 스님들 역시 보시를 청해왔다. 평소에는 법의 위력이 대단하지만 흉년에는 밥의 위력도 그 못지않다. 이후 출가자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노자>를 읽도록 권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알게 했다. 흉년이라는 시절인연을 이용해 불교는 도교를, 도교는 불교를 이해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남을 알아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가르침이지만 서로 알게 되면 서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려고 하는 그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볼 수 있다.
무진거사는 대 문장가인지라 글 보시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그냥 써주는 법이 없었다. 글을 주면서도 꼭 공부무게를 달아보고 써주었다. 담당문준(1061~1115) 선사가 입적하자 탑명(塔銘)을 무진거사에게 부탁하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난 뒤 다비를 하였는데 눈동자와 치아 몇 개는 그대로 있었다. 사리가 무수하게 나왔기 때문에 이를 기록하여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온 납자는 그 회상에 온지 2년밖에 안 된 24살의 젊은이였다. 그래도 심부름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초심자라고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선지(禪旨)에 무슨 세랍과 법랍이 필요한가. 물론 그를 통해 그 집안의 솜씨를 가늠하기 위함이다.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대답을 하면 탑명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돈 5관을 여비로 드리겠으니 발길을 돌려 다시 도솔사로 가서 참선이나 더 하십시오.”
“네! 물으시죠.”
“듣자니 문준 노스님의 눈동자가 부셔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내가 묻는 것은 그 눈동자가 아니오.”
“상공은 어떤 눈동자를 물었습니까?”
“금강(金剛)의 눈동자를 물었소.”
“금강의 눈동자야 상공의 붓끝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늙은이가 그를 위해 광명을 찍어내 그것으로 천지를 비추라는 얘기군요.”
그 젊은 납자는 뜨락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스승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상공의 탑명에 감사드립니다.”
무진거사는 허락하면서 웃었다.
<유마경>과의 인연으로 조사의 도를 만났고 글 보시와 식량을 시주하면서도 늘 빠지지 않는 법에 대한 열정으로 송대(宋代)불교를 빛낸 거사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