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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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야 할 우리땅 북간도/이두(조계종 원로의원·금오문도회 문장)
청·일간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소파 방정환의 ‘별삼형제’

이 동요에는 당시 민족의 슬픔이 그대로 들어있다. 조선을 남선(南鮮), 북선(北鮮)으로 나누어 말하던 습어(習語)가 있었고 간도(間島)에 다수의 동포가 사는 것을 상징적으로 ‘별 삼형제’라고 했다. ‘날 저무는 하늘’은 그때 조국의 상황과 운명을 말한 것이다.
일제 조선척식회사와 금융조합에 토지를 약탈당하고 굶주림에 떨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살 땅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가 정착한곳이 바로 북간도,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다.
한국과 중국은 간도를 놓고 서로 자기의 영토라고 하는 국경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세종때 김종서 장군은 그 땅에 6진을 세우고 조공까지 받았다. 1600년 청나라 건국과 함께 여진족들이 중국본토로 이전하자 청나라는 이곳을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한민족의 유입을 금하였으나 한인들은 내 땅으로 알고 찾아들어 청인들과 충돌이 잦았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불투명한 국경관계를 조사하여 1712년(숙종38년)에 목극등을 파견하여 우리 측의 박권과 국경회담을 한 결과 백두산 산정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비문에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이 있으니 그 분수령위에 비를 세운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연변일대가 한국에 속하며 이 이상을 넘는 광역이다. 그러나 청 말기에 중국은 토문강은 두만강을 지칭한 것이라 우겨 다시 국경논쟁이 치열해졌다. 1894~5년의 청일전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900년 청국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했다.
정부에서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북간도 관리사(北間島 管理使)로 임명하여 이를 주한청국공사에게 통고하는 한편 여기에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증수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계속 관철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간도문제는 청일간의 현안으로 넘어가고 일본은 1907년 간도에 통감부 출장소를 개설한다.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 통감부 출장소 시설의 일본의 구실이었다. 전혀 중국은 간도에 간섭하지 못하였는데 일본이 러·일 전쟁 후 러시아에서 얻은 탄광 철도등 만주에 있어서의 이권문제가 엇갈리게 되자 양국협상을 통해 “청국은 일본이 간도가 청국영토임을 인정하면 만주에 있는 일본의 이권에 대해 양보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1909년 9월4일 한국영토인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청일협약을 체결했다.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이 협약에 따라 통감부 간도출장소는 폐쇄되었으나 일본 총영사관으로 대체됨으로써 간도에 있어 일본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을 억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 집중화할 수 있는 효과까지 얻었다.
1909년 당시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8만2천9백여 명.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정계비를 무시하고 압록강 이남으로 한국영토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힘이 없다 보니까 우리 땅을 남들이 멋대로 농락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만주에서도 간도는 특히 우리민족의 대일항쟁의 근거지로서 이름이 드높았다.
간도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영유권 분쟁을 겪다가 1909년 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간도협정에 따라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일본 식민지에 체결한 조약 모두 무효로 한다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에 의거해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간도는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중국은 중국군과 공산군의 내정싸움이 계속됐고 북한은 정부가 형성되기 이전이었다. 이러한 때 1948년 2월 소련 중공 북한이 체결한 평양문서가 나타났다. 이것에 따르면 동북지방의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확정하고 장차 한국에 귀속 시킨다고 했다. 이러한 시기에 6·25가 터진 것이다. 인민군의 전진이 대구를 조금 남겨두고 부산을 완전 포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고 부산을 포위했던 인민군이 총퇴각하게 됐다.
이때 김일성은 갈 길이 막막해지자 압록강과 두만강이 갈라지는 곳 병오리에 짐을 푸는데 중공지도자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확언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한국과 유엔군은 총퇴각하고 서울로 후퇴, 공산군이 평택까지 오고 인민군 정찰대가 천안까지 밀려왔다고 하니 그때부터 휴전될 때까지는 말로 옮길 수 없는 파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그 후, 어떤 이유로 간도 땅을 중국에 양보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과 중공은 1962년 비밀리에 국경협정을 체결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개인적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마침 중국에 가는 인연이 닿았다. 그때는 중국과 우리나라는 아직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시점이라서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 간도에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니 간도가 중국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간도를 중국에 넘긴 이유에 대해선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6·25때 도와주었다는 이유부터 김일성이 중국을 뜻있게 돕기 위해 간도를 바쳤다는 등 중국이 마다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져간 것이라고…. 김일성이 간도에 있는 동포를 생각한다면, 또 그 땅을 사랑한다면 죽어도 우리 땅을 달라고 빌었으면 간도는 그대로 우리땅이 될 수 있었다고 당시 분해하는 사람들도 여러 명이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는 통일된 조국을 만들어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일, 둘째는 청일간의 간도협약을 해소시켜 우리 영토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일이다. 다소 경제적 부담을 안고라도 그것을 성취해야만 부끄러운 선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간도땅을 찾아야 한다.
2006-08-12 오전 1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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