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무명이 어느 때 비롯되었는지 중생은 그 시초를 알 길이 없으므로 ‘본래부터’ ‘맨 처음’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무명은 일어나는 곳도 없고 그 실상 자체도 없는 것이므로 무명은 환(幻), 허깨비, 꼭두각시, 눈꽃이나 허공의 꽃과 같다.
눈앞에서 헛것이 어른거리는 ‘눈꽃’이나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은 환(幻)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요 꼭두각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이 환같은 무명에서 벌어지는 온갖 연기법이다. 그러므로 이 연기법 또한 하나하나가 모두 환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이 사실을 바로 알면 그 자리가 깨달음이다. <선가귀감> 34장에서는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환(幻)인 줄 알면 환을 여의니
방편 쓸 일이 없을 것이요
환 떠난 그 자리가 깨달음이라
점차 닦을 깨달음도 없어지리라.
‘환인 줄 알면 환을 여의니’의 뜻은,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의 실체가 환인 줄 알았다면, 더 이상 이것에 집착하여 중생의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환을 여읜 이 자리가 깨달음이니,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집착하여 닦을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중생은 허깨비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허망한 경계를 멀리 벗어나야 한다. 허망한 경계를 멀리 벗어나려는 마음을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환같은 그 마음’도 다시 멀리 벗어나야 한다.
‘환(幻) 같은 그 마음’을 멀리 벗어나려는 것도 환(幻)이 되니, 여기에서도 다시 멀리 벗어나야 한다. 멀리 벗어나려는 환을 벗어나고 또 벗어나서 더 벗어날 바 없는 곳을 얻게 되면 곧 모든 환이 없어진다.
불을 지필 때 나무를 서로 비벼 생긴 불이 그 불을 일으킨 나무를 태워 재와 연기로 허공에 사라지듯, 환으로써 환을 닦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마침내 모든 환이 사라진다.
모든 환이 사라지더라도 단멸(斷滅)에 들어가지 않고, 본디 있던 영원히 변치 않을 참마음만 남는다. 환인 줄 알고 환을 떠나니 방편 쓸 일이 없을 것이요, 환 떠난 그 자리가 깨달음이니 점차 닦을 깨달음도 없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心爲幻師也 身爲幻城也 世界 幻衣也 名相은 幻食也 至於起心動念 言妄言眞 無非幻也. 又 無始幻無明 皆從覺心生 幻幻如空華 幻滅名不動 故夢瘡求醫者 寤來無方便 知幻者亦如是.
마음은 꼭두각시를 만드는 요술쟁이다. 몸은 꼭두각시가 사는 마을이고, 세계는 꼭두각시가 입는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꼭두각시가 먹는 음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내는 것이나, 거짓이다 참이다 말하는 것들이 다 꼭두각시 아닌 것이 없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꼭두각시 무명은 다 ‘여여한 마음’인 각심(覺心)에서 나온다. 꼭두각시 하나하나가 다 허공의 꽃과 같지만, 꼭두각시가 없는 깨달음은 ‘번뇌로써 흔들림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꿈에 부스럼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잠이 깨면 병을 고칠 필요가 없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꼭두각시인 줄 알면 꼭두각시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꼭두각시는 남의 조종을 받아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으니, 실체가 없는 허깨비와도 같다. 이 꼭두각시를 다양하게 만들어 조정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중생의 몸은 중생의 마음이 만들어낸 온갖 꼭두각시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비유할 수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중생들이 사니, 이 세계는 꼭두각시들이 입고 사는 옷이나 다름없다. 이 중생들은 이름이나 형상에 집착하고 분별하며 사니, 이름과 형상은 꼭두각시가 먹고 사는 음식이나 마찬가지이다.
알고 보면 중생들이 시비 분별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내는 것들이 다 꼭두각시 아닌 것들이 없다. 참이다 거짓이다 말하는 것들도 다 중생들이 분별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 이 또한 꼭두각시들이다.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원인은 무명에 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무명도 알고 보면 여여한 마음인 각심(覺心)에서 홀연 생겨난 것이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십이연기법 하나하나가 다 꼭두각시이고 허공의 꽃인 것이다. 이런 꼭두각시의 실체를 알아 그 공성(空性)을 보면 참마음이 드러나니, 우리는 그곳을 ‘번뇌에 흔들림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 꿈에 부스럼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잠에서 깨면 아픈 곳이 없어 병을 고칠 필요가 없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꼭두각시인 줄 알면 중생의 병이 없어진 셈이므로, 병을 고칠 수행을 따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萬里浮雲消散盡 一輪明月在寒空
하늘 가득 떠다니던 먹장구름 흩어지니
밝은 달이 두리둥실 저 허공에 떠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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