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커피가 유입되기 전 포도주와 맥주 등 알코올 음료는 유럽인의 음식인 동시에 음료였다. 커피가 유입될 당시 영국은 술이 일상음료가 되어있었다.
특히 1650년대 영국은 내란(청교도 혁명)으로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술을 폭음(暴飮)하였다. 선술집이 있는 거리는 취객들의 소란으로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여 알코올이 심각한 사회적인 병폐가 되었다.
커피는 이러한 사회적인 폐단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의사들에 의하여 알코올 중독을 치유하는 약품의 일종으로 지지를 받는다. 우울한 사람에게 활기를, 다혈질의 사람은 온화한 성품을 주는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기도 한다.
영국은 혼돈의 음료인 알코올에서 정신을 각성(覺醒) 할 수 있는 이성적 음료인 커피로 전환하면서 전반적인 생활의 변화가 왔다.
이 사회적 변화는 ‘파스카 로제’라는 커피하우스를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17세기 후~18세기 초) 커피 하우스가 3000여개나 양산되었다. 이러한 커피하우스는 문학과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토론의 장소요, 사교의 장소로 혼자서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영국인의 습관을 바꾸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몇 가지 독특한 규정이 있다. 대화를 할 때 흥분해서는 안 되며, 건배하는 행위를 금한다.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모두에게 커피 한 잔을 사야하는 벌칙도 두었다. 슬픔에 잠긴 연인들은 커피하우스 안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등 분위기에 많은 신경을 썼다.
한편, 정치인과 상업인, 지식인, 해상인 등 그들이 선호하는 커피 하우스마다 색다른 분위기가 만들어 졌다.
정치인들은 정치 세력을 확장하기위한 당원들의 접대와 집회장소로 이용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윌리엄 존스 법무장관에 의해 커피 하우스를 폐쇄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들의 반발로 커피하우스 안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다시 문을 열기도 하였다.
상업적 장소로 이용되면서 선박과 화물경매를 위해 선장, 선주, 상인들의 모임장소가 되며, 보험회사 대리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신문 <스펙테이터(spectator)>가 발간되기도 하였으며 문인들에 의한 잡지가 만들어지는 등 정기 간행물의 편집소 역할을 한 곳도 바로 이 커피하우스였다.
결과적으로 커피하우스는 지식인들의 대화 장소와 사교장, 정치가의 사무실, 상인들의 상업적인 거래소일 뿐만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이 커피 하우스가 극장과 살롱과 비교되어 자유로운 공동의 오락 장소인 문화와 상업적 공간으로 발전되어 시민들의 생활중심의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이다.
이 당시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는 형식에는 관심을 없었다. 커피는 처음에는 공적인 장소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였다. 차와 코코아도 판매를 하였으나 여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차의 소비가 많지 않았다.
가정의 일상음료가 되면서 친숙한 부인들의 커피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주 또는 매번 만나 커피를 마시는 놀이 문화가 형성된다.
19세기에 이르러 차와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커피하우스에서 조간신문과 모닝커피가 있는 집으로 장소가 바뀌게 된다.
커피는 한 때 알코올에 지쳐있는 영국인을 각성시키는 새로운 음료로 합리적 사고력을 만드는데 기여하였으나 차(茶)처럼 영국인의 일용품이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