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저작에는 저자가 없다
혜능의 복덕성(福德性)이 내 해석과 다르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묻는다. <금강경>의 번역을 다시 보자.
‘복덕성’은 좋은 것인가 아닌가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사람들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보시로 기부한다면, 이 사람의 복덕(福德)은 엄청나겠지.” 수보리가 대답했다 “대단히 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겠느냐. 이 복덕은 복덕의 성질(福德性)을 갖고 있지 않은 바, 그래서 여래께서 매우 큰 복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여기서 나는 복덕성을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여기 복덕의 성질(性)이란, ‘내가 복덕을 의식하고 그 축적을 계산하고 있는’ 분별을 가리킨다고 썼다. 그러니 그것을 지워야, 그것으로부터 공(空), 즉 자유로와야 보시가 진정 공덕으로 기록되고, 복덕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혜능은 거꾸로 생각한다. 복덕성을 ‘진정한 복덕, 그 복덕됨’으로 적극 높인 것이다. 그는 진정한 복덕성을 성취하기 위한 몇가지 실천적 태도를 제안해주기까지 했다. 예컨대, “1) 마음에 능소(能所)즉, 너와 나를 가르고, 자기편할대로 시비선악을 판정하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2) 붓다의 말은 물론이고, 그 행동과 삶을 따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혜능의 해석에 따르면 <금강경> 본문의 번역은 전혀 달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째서겠느냐, 이를 복덕이라고 말한다면 즉, 진정한 복덕성이 아니다. 이 주의를 전제로 하여 여래께서는 ‘그 복덕이 크고 위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해석의 갈래길 답사
과연 어느 해석이 맞을까. 판단은 유보하고 다른 사람 의견부터 들어보자. <금강경오가해>에는 무착(無着)의 이런 저런 의견이 많이 실려 있는데, 거기 복덕성 구절밑에 이런 훈수가 붙어있다.
“無著云, 是福者標牒, 卽非者約勝義空, 是故者約世俗有.” 무착은 내 편을 들고 있는 듯하다. 인도식 훈고를 본뜬 것이라 주석은 불친절하고 간략하기 이를데 없지만, 풀자면 이렇다. “복덕 운운한 것은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그것이 복덕성이 아니라고 한 것은 최종적으로 공덕이 공(空)함을, 즉 성립치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복덕을 운운한 것은 세속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영역본 또한 내 편에 섰다. 콘즈의 영역은 “And why? Because the Tathagata spoke of the ‘heap of merit’ as a non-heap. That is how the Tathagata speaks of ‘heap of merit’”이다. 번역하자면, “왜냐, 여래는 공덕의 축적을 비-축적(非福德性)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것이 여래가 공덕의 축적을 말하는 방식이다.”
이쯤되면 문자적으로는 내 해석의 손이 올라갈 것같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혜능의 해석이 가슴을 찌르고 뒤통수에 불이 번쩍이게 한다. 문자적 학문적으로는 내가 기특할지 모르나, 그러나 수행적 학습적(heuristic) 관점에서는 얘기가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식과 학문의 근본 문제에 걸려 있다는 것만 우선 짚어두자.
‘비(非)-복덕성’인가, ‘비복덕-성(性)’인가
해석의 미로가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석의 샛길은 예기치 않던 곳으로 뻗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강경>이 복덕성을 ‘마침내 지워야할 분별’로 보았는지, 아니면 ‘진정한 복덕의 성취’로 읽었는지를 두고, 따져왔다. 그래도 둘이 문자적으로 합치되는 지점은 있었다. 즉, ‘비복덕성(非福德性)’을 ‘복덕성이 아니다’라고 읽는 데에는 하이파이브, 의견이 일치했다. 그런데 거기 끼어든 다른 목소리도 있다.
프라이스(A.F Price)가 영역한 <금강경>은 해당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Wherefore? Because merit partakes of the character of no-merit, the Tathagata characterizes the merit as great.” 번역하자면 “왜냐, 공덕은 비-공덕의 특성을 띠기 때문에, 여래께서 그 공덕을 위대하다고 특징하셨다.” 프라이스는 지금 비복덕성을 ‘복덕성이 아니다’가 아니라 ‘복덕이 아닌 성질’로 번역했다. 재미있지 않은가. ‘비(非)-복덕성’이 아니라 비복덕-성(性)으로 끊어읽은 상상력이….
이 새로운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 독법이 기발하지만, 글쎄, 원문맥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가만 있자, 다시 보니 그렇게 읽어도 체례를 다치지 않는 것같네... 이를 어쩌나. 그런 당황한 눈으로 보고 나니, 콘즈의 영역도 지금 프라이스처럼 해석해 놓은 것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는 복덕은 ‘복덕이 아닌 성격’을 갖고 있다”고 번역해서 안될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다시 살펴야겠다.
번역이란 이런 엎치락뒤치락의 작업이고, 여러 문헌적 해석학적 작업에 열려 있다. 여러분이 이 여행에 동참할 수 있다면 글, 경전이나 고전을 읽는 재미가 와우나 마비노기같은 애들 게임은 저리 가라다. 그러나 이 일은 여가와 에너지 그리고 시간을 요하기에 아무에게나 권할 수 없어 아쉽다.
누가 한 말인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이 구절을 너무나 당연하게 ‘붓다’의 말씀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맙소사, 콘즈의 영역이 수부티(수보리)의 통찰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도 그런가?”하고 나카무라며 다른 번역 몇 개를 살폈더니... 다들 수부티의 언사로들 적어놓았다.
그럼, 전체 번역은 이렇게 된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사람들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보시로 기부한다면, 이 사람의 복덕(福德)은 엄청나겠지.” 수보리가 대답했다 “대단히 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복덕의 성질(福德性)을 갖고 있지 않은 바, 그래서 여래께서 매우 큰 복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틀렸나? 내 인상적 직감적 번역이 길을 잘못 들은 것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래도 그냥 꼬리를 내리기는 좀 뭣하다. 나는 판단이 헷갈릴 때, 대체로 처음 느낌이 옳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내가 이 구절을 ‘붓다’의 말로 의심없이(?) 판단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무의식의 과정을 되짚어보니 이렇다. <금강경> 안의 수많은 역설적 화법들은 수보리가 아니라 ‘붓다’가 설한 것이다! 수보리는 때로 이 통찰을 미리 알고 있기도 하지만, 때로 깜빡 놓치기도 한다. “내가 말하는 ()는 ()가 아니다. 그래서 ()라고 한다” 앞에는 예외없이 “수보리야”라는 호격이 선행한다. 나는 이 패턴에 따라, 이 구절을 붓다의 말로 풀었다.
헷갈린다고 독자제현들께서는 너무 머리 쥐어뜯지 말기를 당부한다. 해석의 여러 갈래길을 추리소설처럼 쫓아왔으니 즐거운 일이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불교는 그것을 ‘누가 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교의 저작들에는 지은이가 없다. 문제는 메시지이고, 실천이다. 이 점에서 <금강경>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은 간명 직절, 모호한 구석이 없다. 하니, 이 연재 또한 괜히 평지풍파에 긁어부스럼, 아니면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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