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교단에서는 살생, 음행, 도적질, 거짓말 이 네 가지 계목을 어기면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로 규정,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고 한다. 이 계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하면 승단에서 쫓겨나 다시는 승려가 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죄다. 승려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고 또 죽어서는 영원토록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는 무섭고도 엄중한 계목이다. 그러나 <선가귀감> 33장에서는 죄의 참다운 성품을 알면 죄를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불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諦觀殺盜淫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이 다 한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 그 자리에서 바로 온갖 번뇌가 사라져 마음이 고요하니, 어찌 여기에 버려야 할 번뇌가 남아 있겠는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이 다 한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무생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무생의 이치를 깨달아 텅 빈 마음이 되니, 세간의 법이 없어져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들 번뇌 자체가 없어져 버리니 이들 과보가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모든 법의 실체는 알고 보면 텅 비어 있는 고요한 성품이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생멸하여 변화할 것이 없다. 범부들은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지은 죄에 집착하여 잘못한 과보를 받을까봐 크게 두려워 하지만, 성인들은 무생의 이치를 알고 인과를 뛰어 넘어 바로 열반에 든다.
옛날 용시(勇施)라는 비구가 있었다. 얼굴이 잘 생겨서 좋아하는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탁발하러 온 그를 보고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스런 딸아이의 죽어가는 모습에 애가 타던 어머니는 마침내 계책을 써서 비구를 유인하려 “제 딸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니 스님께서 자주 오셔서 법을 설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몇 번이고 사양하다가 간청에 못 이긴 비구는 할 수 없이 그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여자는 병이 차츰 나았고 비구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비구는 마침내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젊은 부인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비구는 그 집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자는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 두려웠지만, 비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컸으므로 음식에 몰래 독을 타서 남편을 죽여 버렸다.
비구는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이 엄청나고 불행한 일에 크게 뉘우치며 “음욕과 살생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일어났으니, 나는 죽어서 무간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감히 법복을 입을 수 없으니 벗어놓고 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내가 중죄를 범했으니 누가 나의 참회를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라며 가슴을 치며 절규하였다.
그러다 비국다라 존자를 만나게 되었다. 존자는 비구를 경책하며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두려움이 없는 법을 설하리라. 죄의 성품이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라며 게송으로 말했다.
諸法同鏡像 亦如水中月 凡夫愚惑心 分別癡 愛
모든 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 같고/ 강물 속에 떠 있는 달과 같은데/ 범부들은 어리석게 이에 집착하여/ 욕심내고 성을 내며 분별을 한다.
비구는 이 소리에 마음이 툭 트여 크게 깨달은 뒤 보월여래(寶月如來)가 되었다. 무생(無生)의 이치를 알고 성불하여 지금까지 보월여래라는 이름으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증도가>에서 “용시 비구가 중죄를 범했으나 무생의 이치를 깨닫고 성불하시니, 지금까지 공경 받는 부처님이 바로 그 분”이라고 하였다.
음행과 살생에 연관된 용시 비구가 성불했다고 말하면 “누구든지 큰 죄를 지어 가며 공부해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불법을 바로 믿고 그대로 공부를 하면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극악한 사람도 바른 법을 바로 믿고 공부하면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데 착한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서산 스님은 “이 단락에서 성(性)과 상(相)을 함께 드러낸다. 경에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 이를 무명을 영원히 끊은 것이라 한다’고 했고, 또 ‘한 생각 일어날 때 그것을 바로 안다’”라고 했다.
성(性)은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번뇌가 사라져 마음이 고요한 것(當處便寂)’이고, 상(相)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이 다 한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殺盜淫妄 從一心上起)’이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不起一念) 상(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인연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으니 일으킬 번뇌가 없어 영원히 무명을 끊었다는 것이다(永斷無明). 한 생각이 일어날 때(念起) 그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아니(卽覺) 어찌 여기에 버려야 할 번뇌가 남아 있겠는가.
cafe.buddhapia.com/community/won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