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거사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혜림사에 인연을 두고 있는 어느 납자를 만나게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납자의 말투에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다. 제방의 여타 어느 선림이라 할지라도 그 회상의 선지식의 경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혜림가풍’ 만이 최고라는 거였다. 남을 인정하지 않고 또 따라서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중생심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것같다.
이럴 경우에는 정말 몽둥이가 제대로 된 치료약이다. 그래도 재가자인 무진거사로서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다음은 할(喝)이지만 그것도 상대가 출가자인지라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도 거침없는 자기문파 자랑은 끝이 없다. 대신 자기공부 경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자기안목과 살림살이가 없을 수록 문중과 스승을 등에 업고서 자기를 과시하려 한다.
하긴 실력자나 세력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학연 지연 혈연을 강조하며 자기와의 인연을 강조하는 사람치고 현재 위치가 제대로 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런 인간들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듣다못한 무진거사가 소견없는 안목이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한마디는 물론 입을 막기 위한 수단. 법거량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그 납자는 말을 멈추고 무진거사의 입을 긴장하며 쳐다보고는 말했다.
“아! 예.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이런 사람일수록 허풍은 더 세기 마련이다.
“현자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주 앞에 놓인 술잔(神前酒臺盤)’이라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요?” 그 납자는 눈이 휘둥그래진 채 한참동안 무진거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혼자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신주 앞의 술잔? …”
현자 선사는 동산양개 선사의 심인(心印)을 받은 뒤 세속과 어울려 살았다. 날마다 강변에서 조개와 굴을 따다가 배를 채웠으므로 사람들이 ‘현자(조개) 스님’이라고 불렀다. 밤이 되면 사당에 가서 죽은 자를 위해 관 속에 넣는 가짜 종이 돈인 지전(紙錢)속에서 그것을 이불삼아 지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화엄사 휴정선사가 그의 도력을 시험하고자 했다. 진짜 무애행을 하는지 땡초의 기행(奇行)인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사당의 지전 속에 먼저 들어가 누워 숨어서 현자선사를 기다렸다. 그가 사당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꼭 붙들고 느닷없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인가?” 그는 놀라지도 않았고 머뭇거림도 없이 단박에 말했다.
“위패 앞에 놓인 술잔이로다!”
이를 미루어 현자 선사는 그런대로 공부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혜림문파의 법손임을 힘주어 강조하는 그 납자는 계속 묵묵부답. 무진거사가 놀려주듯 한마디했다. “오늘 저녁 사당에 등불이 밝혀져 있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현자선사의 불법은 헛되게 될 것이오.”
현재 해인총림 방장으로 계시는 법전 선사께서 젊은 시절 대승사 묘적암에서 한 경계를 일으킨 후, 점검을 받고자 성철(1912~1993) 선사가 머물고 있던 파계사 성전암으로 달려가니, 질문이 날아왔다.
“어떤 학인이 스승에게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라고 물으니, 스승은 ‘죽은 사람 술상 위에 술이 석 잔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 때 너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바로 ‘그 술잔’이 그대로 활구(活句)가 되어버린 것이다. 법전 선사는 짧은 곡(哭)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