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7월 1일 중국 칭하이(靑海) 성과 티베트 수도 라사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해발 4,000m가 넘는 지역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철도’로, “앞으로 티베트 개발과 관광 산업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이어졌다.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특급 관광열차를 타고 24시간이면 라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니 ‘티베트 관광 산업’이 성장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철도 개통이 가져올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기껏해야 “풍광 훼손 등 부작용 우려”(‘한국일보’ 2006. 5. 2.)와 같이 환경 훼손을 걱정하는 정도이지, 티베트 전통의 파괴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자주권 회복의 불확실성 등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전근대 왕조 시대 이래로 역대 중국 정권이 주변 이민족에 써온 정책은, 한족(漢族)을 대량으로 이주시키는 ‘사민(徙民)’정책이었다. 1949년 공산 정권 수립 후 이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서북부의 ‘신지앙(新疆)위그르 자치구’ 같은 곳에도 이미 한족이 반을 넘어서는 상황이다.
중국 중앙정부 입장에서 보면, 그 동안 장애가 많았던 티베트로의 대량 이주도 이 칭장(靑藏) 철도 개통과 함께 난관이 사라진 셈이다. 반대로, 티베트 민족의 입장에서는 앞날을 어둡게 하는 ‘나쁜 소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중국의 침입으로 나라를 잃은 티베트 민족이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전통 문화와 종교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 강대국 인도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는 수십 년 동안 ‘불편한 관계’로 지내왔다. 국경 충돌이 빚어진 적도 자주 있었고, 남아시아 지역의 맹주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인도가 티베트 망명 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티베트 난민들을 위한 정착지를 인정해주었던 것도 ‘중국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불편하기만 했던 ‘인도-중국’ 사이의 관계가 최근 들어 바뀌고 있다. 중국의 영문 일간지 <차이나 데일리(China Daily)> 7월 20일자에 따르면, 당(唐) 시대 인도로 구법(求法) 순례를 다녀온 현장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중국-대만 합동 순례단’이 시안(西安)을 떠나 인도로 출발하였다.
순례단의 출발 기념식장에서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성회이(聖輝) 스님이 “이번 여정은 중국과 인도 사이의 긴밀한 관계와 문화 교류를 더욱 원활하게 촉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한 데에서도 쉽게 눈치 챌 수 있듯이, 이 순례단의 행보는 순수한 불교 신앙의 차원을 떠난 정치 외교적 배경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강대국의 외교 게임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티베트의 입장에서는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다.
1972년, 그때까지 ‘죽(竹)의 장막’이라고 불리던 중국의 문을 열게 한 것은 미국 탁구 대표단의 베이징 친선방문과 그에 이어지는 ‘중미(中美) 수교’였다.
이번 ‘현장 프로젝트’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면, 티베트의 앞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떨치기 어려운 상황이 인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7월 31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인도 뉴델리에 거주하는 티베트 난민 6,000여 명이 어렵게 장만한 터전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새삼 나라 잃은 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인도 정부에서 도로확장 등을 이유로 들면서 다른 곳에 대체 정착지를 마련해준다고 하지만, ‘현장 프로젝트’ 와 동시에 일어나는 이 일 또한 티베트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 보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대한제국 말, 주변 강대국들의 밀약(密約)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상실한 쓰라린 역사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중-인 관계 개선’과 더불어 더욱 불안해지는 티베트 민족의 상황이 결코 ‘강 건너 남의 집에 난 불’일 수 없다.